하나님과의 동행/포토 묵상

사람 낚는 어부의 불편한 진실(마태복음 4장 18-20)

강 영 길 2011. 12. 18. 23:10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에 나는 문학청년으로서 원대한 꿈이 있었다. 기필코 좋은 문학을 해서 이름을 남기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하지만 웬걸, 정작 작가가 된 나의 현실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작가가 되어 얻은 것이 있다면 문학 청년같은 열정과 기개를 잃었다는 점이다. 내가 무명 작가로 살아온지 20년, 아니 작가가 된지 20년인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버린 덕에 나는 무명작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차라리 등단한 소설가가 된 것이 더 슬프다. 열정조차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나의 심장을 격동시키는 구절이 나오곤 한다.

심장을 두드리는 구절을 만나면 나는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그만두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할 것같다. 물론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도전이다. 당장 예수님의 제자로 살지 못하는 데 대한 좌절감을 맛볼 때가 많지만 그것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자기 위안도 해 본다.

 

이런 데서 나는 위안을 받기로 한다. 내가 지금 사역자가 아니어서 오히려 더 열정이 있을 수 있다는 비굴한 자기 위안 말이다. 하지만 실제론 문학과 신앙은 너무나 달라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작가가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마태복음 4장 18절-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신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도시에서 살면서 이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멋지고 낭만적인 제안을 하신 것이다. 찰랑거리는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과 은빛 물결을 바라보면서 황금빛으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나 핏빛으로 저무는 저녁 햇살을 보면서 낚시를 드리우거나 그물을 건지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될 것만 같다. 예수님은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이런 멋진 일을 우리에게도 시키려고 하는지 모른다.

 

최근 인신매매된 남자들이 어느 외딴 섬에 어부로 팔려가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면서 배 위에서 심각하게 힘든 노동을 한다. 그들의 노동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노동이다. 이 배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목숨을 걸어야 하고 심지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반드시 이런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부들은 찰랑찰랑한 바다에서 노래를 들으며 시 한 편 짓는 사람들이 아니다. 배를 집어삼키려는 시커먼 파도와 싸운다. 하루 종일 불어오는 살을 가르는 바닷 바람과 작렬하는 햇살과 전투를 해야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처음 배를 타는 사람이라면 창자가 다 뒤집힐 것 같은 멀미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에서는 용변조차 마땅히 볼 수가 없다. 물때에 따라서 밤낮없이 나가서 그물을 던지고 낚시를 해야 한다. 때로는 폭풍을 만나 배가 뒤집히기도 하고 온몸에 닭살이 돋는 추위에 위아래 턱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가운데 극단적인 추위와 싸울 때도 있다. 그렇게 싸우고도 밤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할 때도 있다.

 

어부들은 농사꾼과 다르다. 농사꾼은 정직하게 농사를 지으면 되고, 농사에는 대단히 큰 변수가 없다. 하지만 어부는 물고기가 자기 근처에 와야만 잡을 수가 있다. 그해의 조류와 수온에 따라 어업은 너무나 많은 변수를 겪는다. 어떤 때는 풍어를 하지만 어떤 때는 일년 내내 단돈 백만원도 벌지 못할 때가 있다. 이른바 소득이 전혀 예측되지 않으며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부의 더 힘든 삶을 나열할 수도 있다. 낚싯줄을 당기다가 손가락이 다 갈라지는 경우라든지, 바닷바람을 맞아서 늘 검은 피부나 충혈된 눈동자, 굽어버린 손가락, 가난해서 고치지도 못한 치아들, 그래서 앞니가 다 빠진 어부들, 그리고 심심찮게 그물에 걸려 바다에 끌려 들어가 숨진 자들, 바위에서 낚시를 하다 미끄러져 죽은 자들.......자, 어쩌면 우리는 이제 어부에게 꿈꿀 수 있는 모든 낭만을 지우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어부는 이 세상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힘겨운 직업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을 때는 가장 천박한 직업이었다. 지금도 내 형님은 어부다. 평생 어부로 살았다. 과연 나는 어부로 살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어부는 정말로 가난하고 힘든 직업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코 남보다  잘 살 수 없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을 지도할 자리에는 올라갈 수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참으로 겁나는 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벼슬 자리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와 명예를 보장하지도 않았다. 멋진 여자나 고운 옷을 보장한 적도 없다. 마가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단 한 벌의 옷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까지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결코, 결단코 화려한 삶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받는 축복이 결코 배부름이나 명예로움이나 안락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하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면 앞에서 본 낭만적인 시인과 같은 어부가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어부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어부가 무엇인지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농부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바와 같은 비천한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럴 각오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선장이 되리라 기대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을 누군가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멋진 자리에 있는 선장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선장이 되는 거라고 착각해서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서로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섬기려 하지 않고 자꾸만 내가 주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부르신 목적이 그것이라면 예수님은 "너희를 사람을 인도하는 선장으로 만들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어부가 되는 것이다. 일년 열두달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거의 굶으면서 그리고 가장 낮은 직분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 각오가 된 자만이 사람낚는 어부가 될 자격이 있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 이것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나는 누구인가? 제자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뭉기적 거린 게 아니라 "바로" 따라 갔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갈 것인가?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갈 것인가? 나중에 가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따라갈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