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서/창세기

창세기 32장

강 영 길 2013. 12. 9. 13:44

야곱이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하다

32장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천사들이 나타났다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왜 천사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을까? 그것은 야곱의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준 것이다. 어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은 물질적인 것을 내세워 에서를 설득해 보려 하고 있다. 또한 에서가 이렇게 오는 것은 틀림없이 복수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리 통보를 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이처럼 물질적으로 거래하거나 복수하거나, 화평치 못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때 인간이 갖는 태도가 잘 드러난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지팡이 하나 들고 떠나서 부자가 되어 돌아온 야곱의 인생, 모든 삶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지팡이 하나를 든 것이고 하나님을 만날 때는 부자가 된 것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은 늘 그러지 못한다. 두려움에 찬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자기 기도를 들어주기를 원하고 있다. 야곱은 인간적인 두려움을 낱낱이 하나님께 고한다. 솔직하게 자기 고백을 하고 자기가 겁을 먹은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기도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자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고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고해야 한다. 만일 회사 사장에게 자기 상황을 말하려 할 때도 낱낱이 고하지 않겠는가? 그 기도의 주제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없애달라는 기도여야 한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주장하는 기도가 바람직한 기도는 아니다. 인간이 무엇이어서 감히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내세우겠는가?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거래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의도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와같은 기도에도 최선을 다해 응하신다.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야곱이 브니엘에서 씨름을 하다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에서에게 주려는 가축의 합이 적어도 550마리다. 야곱은 이렇게 많은 재산이 있으므로 굳이 고향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왜 돌아갈까? 그것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야곱이 숱한 인간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약점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취하는 것은 순종하는 마음이다.)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야곱은 탁월한 책략가임을 여기서도 보여준다. 장자권을 빼앗을 때부터 이 장면까지 야곱은 철저한 모략가였다. 가축을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여러 떼로 나누어 보냄으로써 에서의 마음이 차츰 풀리게 하고 있다. 야곱은 물질적 인간으로 보자면 영리한 인간이나 절대적 가치의 인간으로 보자면 매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곱에게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문제가 있고 비판의 대상이 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은 위대하다. 반대로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부족하다.)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가족과 소유물까지 모두 없는, 그래서 단독자로 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있을 때가 하나님을 만나기 가장 좋은 때다.)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하나님은 이렇게 홀로 남아 외로운 이들에게 늘 역사하셨다. 외롭고 힘들고 지쳐서 홀로 남아 기도하는 자들, 홀로 남아 괴로운 자들은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 그때에 바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기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홀로 남았을 때다. 마음이 심란한 야곱이 행인에게 씨름하자고 대들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온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려온 것과 같은 의미다. 축복을 하려고 작정하여 내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하기 전에 떠나려 했고 야곱은 이를 철저하게 붙들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으나 우리가 철저하게 이를 붙들어야 한다. 그럴 때에 축복이 완성된다.)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을 이기지 못한다고 판단한 순간 이미 축복을 약속한 것이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진 것은 더 이상 야곱이 정상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야곱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장애인이 되고 나서다. 당시에 장애인은 부락에서 권위를 상실한 사람이다. 인간적 권위를 상실한 그 순간-실패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그의 머리에 기름 부어 지는 것이다.)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보내달라고 청하고 있다. 하나님은 야곱을 떼어버리고 가면 됐을 텐데 가지 않고 이렇게 말하여 야곱의 태도를 지켜보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를 때 정말로 끝까지 따르는지 아닌지를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은 물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다고 한다. 야곱이 겨룬 것은 하나님이되 하나님은 사람이 사는 땅에서도 야곱이 이긴 것으로 인정하고 축복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에게서도 이길 수 있게 해 주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준다. 이름을 바꾸는 건 의미, 곧 정체성을 바꾼 것이다. 야곱은 이제 과거의 야곱이 아니라 미래의 이스라엘이다. 이 순간부터 앞으로의 삶이 전개된다. 신앙인의 삶은 그래서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은 다리만 부러지는 게 아니라 생명도 빼앗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야곱은 홀로 남아서 밤새 싸우며 축복을 얻어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아뢸 때 야곱처럼 목숨을 걸고 온 힘을 다 해 싸우는 마음으로 아뢰어야 한다. 야곱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름을 묻지 못하게 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으면 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을 우리 머리로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야곱에게 밝혔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고 한 것이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름도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인정한 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인간이 측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야곱은 이제 절름발이가 되었다. 인간으로서 큰 흠이 생긴 것이다. 이 큰 흠이 오히려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통로가 되었다. 우리 눈에 흠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곤 한다. 또한 이것은 그동안 야곱이 자기 힘으로 버티려고 했던 것을 무너뜨렸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온갖 술책으로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러졌다는 뜻이 될 것이다. 야곱은 다리가 부러지는 사건으로 인해 과거의 야곱이 아닌 새로운 야곱이 되다. 따라서 다리가 부러진 것은 재앙이 아니라 은혜다. 우리가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실은 은혜다.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힘줄을 먹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때만 기억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 사실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