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서/창세기

창세기 38장

강 영 길 2013. 12. 12. 09:50

유다와 다말

38장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야곱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아들의 혼처를 결정지었다. 야곱 이후에 다윗도 아들의 혼처를 정해준다. 유다도 아들에게 혼처를 정해준다. 그런데 야곱은 유다의 혼처를 정해주지 않았다. 유다가 원하는 여자, 이방 여자와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는다. 자신이 이방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전통과 규칙을 깬 것이다. 전통과 규칙은 한 번 깨면 계속해서 깨지게 마련이다. 유다의 선택은 앞으로도 많은 문제가 흔들릴 것임을 예고하는 셈이다.)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오난도 전통과 규칙을 어긴다. 오난은 형수에게서 성욕만 채우고 종족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어겼다. 욕망만 채우고 의무를 다 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다말을 보낸 것은 정말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속임수다. 유다가 다말을 보낸 것은 정직한 행동이 아니다. 두려움이 앞서면 정직하지 못한다. 유다는 아들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자기가 지킬 전통을 피해가려 한다.)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세상에 비밀은 없다. 다말의 사정을 알고 있었으며 다말에게 정보도 제공했다. 어려움에 처해있어도 소문은 돌게 마련이다.)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롯의 딸들이 아버지의 씨를 임신했는데 이번에는 유다의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씨를 얻고 있다.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정한 순리와 질서를 하나하나 깨부수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은 유다의 두려움에 원인이 있다. 막내 셀라가 죽을까봐 하나님이 정한 법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만일 두려웠다면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간구했어야 한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고 자기 두려움에 갇혔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정한 질서가 깨진 것이다.)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다말은 매우 용의주도한 사람이다. 이런 결과를 낳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기도 했고 치밀한 계획까지 짰다. 기왕에 일을 성공시키려면 치밀하게 성공시켜야 한다.)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유다가 창녀와 동침하는 것에 대한 정죄의 말은 없다. 게다가 관계를 하기 위한 거래를 하고 있다. 유다의 행위에 대한 일언반구의 판단이 없는 것은 이 당시에 남자가 창녀와 자는 것이 일상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유다가 친구에게 부탁하여 창녀의 담보물을 가져오라고 한 것을 보면 창녀와 동침한 것이 당대에 당연시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이미 저지른 일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 일의 결과로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하고 있다. 많은 경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돌이키는 게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명성이 깎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될 때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천국도 놓친다. 자신의 잘못을 먼저 돌이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유다는 자신이 며느리를 돌볼 책임이 있음에도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다. 책임을 이행하지 않다가 며느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여자를 불태워죽이라고 한다. 그동안 사실상 버려두었던 사람이 무슨 짓을 했건 무슨 상관일까만 유다는 자신의 의무는 안 하면서 주권만을 행사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도 상대의 약점을 잡을 기회만 오면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약점을 공격한다. 아니 이런 자들이 오히려 심하게 공격한다. 유다는 며느리에게 가장 극형을 내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며느리와 동침하여 자녀를 나은 유다는 회개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도 인정했다. 더구나 그 여인이 자신보다 옳다고 했다. 자기가 더 죄인임을 인정할 때 문제 상황은 사라진다. 지금의 태도로 보아 유다는 성품이 매우 온유한 사람같다. 그리고 다시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범죄로 가지 않는다. 인간의 죄는 한 번 문을 열면 반복된다. 따라서 얼마든지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기 아들 셀라를 아껴서 생긴 사건이다. 인간에겐 늘 관습법이 있다. 관습법을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관습법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오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하나님이 주신 법이라면 더욱 더 따라야 한다.)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이 베레스가 예수님의 혈통의 조상이다. 베레스는 우선 시아버지의 거짓말과 며느리의 속임수 사이에 낳은 아들이니 참으로 비정상적 가문의 아들이다. 창세기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불륜의 아들이다. 게다가 베레스는 장자가 아니다. 형과 순서를 뒤집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육적 혈통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비난이 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왜냐면 어떤 그릇을 사용할 것인가는 오직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