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사도행전

사도행전 9장

강 영 길 2013. 12. 24. 10:42

9장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얼마나 철저히 그리스도인을 탄압했는지 알 수 있다. 집집을 샅샅이 뒤질 뿐만 아니라 치밀한 계획까지 하여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있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길을 가는데 갑자기 빛이 자신만을 비추어 감싸는 장면이다. 이때 사울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전지전능한 예수님은 사울이 이 길을 가는 것도 다 관찰하고 계셨다. 하고 많은 기회 중에 꿈에 나타난 것도 아니고 식사중에 나타난 것도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대거 잡으러 갈 때 예수님이 나타났다. 예수님은 그만큼 절묘한 타이밍을 잡으신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일을 이룰 가장 좋은 시점을 잡으신다. 사도들을 잡으러 간 사람이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의 반전의 효과는 엄청났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바로 그 시점에서 나타난다.)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사울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러 가는 길이다.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 단도직입 사울에게 명령하고 있다.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상식적으로 이런 명령을 따르기란 어렵다. 하지만 하늘에서 나는 예수님의 명령에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을 것이다.)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흘 동안 사울에게는 어둠이 내렸다. 어둠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치 죽음에 이르듯이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세례를 받는 것과 같은 의미다.)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예수님이 지금 땅에 계시듯이 이런 저런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사울을 그만큼 큰 도구로 사용할 계획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예수님은 이미 사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면 눈을 뜬다는 환상이다. 아나니아에게는 사울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예수님이 직접 눈을 뜨게 하시면 될 것을 왜 아나니아를 동원하실까? 하나님은 늘 사람을 그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직접 하시는 것보다 사람을 통해 일하는 것을 더 즐거워하신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유명하지 않더라도 가까이 있는 제자 중 하나를 택하여 보낸 것이다. 아나니아는 이후 가장 큰 사역을 하는 바울을 위한 도구가 되었으니 그에게 내린 축복도 또한 크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아나니아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동원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처럼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할 때는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것과 같다. 우리가 걸인에게 도움을 줄 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그냥 적선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가장 적대적인 인물을 택해서 가장 큰 도구로 쓰신 예수님의 마음이 곧 반대정신이다. 적대적인 사람을 적대적으로 보지 말고 더 큰 그릇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좋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가 탄압하는 자인 줄 알았으되 두려움 없이 떠났다. 예수님이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울을 보자 예수님의 마음으로 접근한다. 그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형제라고 한다. 그가 스데반을 죽인 것도 알고 믿음의 가족을 탄압한 것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것에 대해 일말의 쓴 뿌리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에게 다가간다. 모든 것을 용서한 것이다. 아니 그가 용서할 것은 없었다. 예수님이 용서했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가타부타하지 않는다. 그저 따르면 된다. 아나니아는 그렇게 따라갔을 뿐이다.)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누구든지 반드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는 것은 형식이 아니다. 아니 형식일지라도 너무나 중요한 형식이다.)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백팔십도 바뀔 수 있다. 사울은 사람들을 죽이러 갔다가 오히려 전도를 하고 있다.)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모든 악의 산물들이 보이는 태도다. 같은 편이었던 사람이 변하면 먼저 그 사실에 대해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또 그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용가치의 측면에서만 생각한다. 사울이 변하자 이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오히려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형제는 아무리 자신을 배반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를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스데반은 순교를 했으나 바울은 도망친다. 상황 논리를 적용하는 게 아니라 각자 할 일에 따라 이처럼 선택된다. 이 도망은 회피가 아니라 더 큰 것을 도모하기 위한 도전이다. 우리가 자리를 피할 때 회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더 큰 것을 위한 도전일 때 선택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할 때는 이처럼 경계할 수 있다. 그가 워낙 큰 적이었으므로 그 담을 허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계시하여 12사도에게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다. 이도 또한 사람들이 풀어가길 바라셨던 것이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바울의 변화를 바나바가 설명한 것은 절반쯤의 성공이다. 그 설명으로 믿음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을 바울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목숨을 건 복음 전파의 대열에 들어서서 진정성을 보이자 사람들이 그를 믿는다. 우리가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열정을 보여야 한다. 말로는 증언하였으나 몸으로는 증언하지 않는 자는 공동체의 확인을 받기 어렵다.)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그리하여,에 해당하는 내용은 다소로 바울을 보낸 것이다. 바울이 다소로 가자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하며 성령의 위로가 왔다. 적이었던 바울 한 사람의 변화로 온 세상이 완전히 다른 힘을 얻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것이다. 한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을 큰 도구로 사용하실 때 세상이 바뀔 수 있다.)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는 늘 예수님이 낫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을 텐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베드로를 더 위대하게 만든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는 베드로 대로 사역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 여기서는 베드로 저기는 바울 다른 데서는 빌립 등등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고 있다. 열 두 명의 제자가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선행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사람들은 도르가의 선행을 증명하며 슬퍼한다. 특히 울부짖는 사람들이 과부들이다. 과부는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도르가는 그들을 돌보던 사람이었다. 그를 위해 베드로는 다른 일을 젖혀 두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우리는 착한 일을 해도 죽는다. 또 착한 일을 하던 자도 자칫 사망의 길에 빠질 수 있다. 베드로는 도르가를 기도하여 살린다. 기도는 죽은 사람을 살린다. 기도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성경에서 모든 일은 기도로 일어났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답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사실은 변화된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우리가 살아나서 할 일은 주를 믿는 것이다. 증거를 보이는 것도 주를 믿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순간이 우리가 생명에 동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