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사도행전

사도행전 14장

강 영 길 2013. 12. 26. 22:24

14장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불순종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타인들을 선동하여 공동체를 깨게 한다.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더 높은 자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다.)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을 비방하지 않고 오직 말씀 전하기에 전력을 했다. 이것이 반대정신이다. 그리스도인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묵묵히 하나님을 붙잡고 가야 한다. 이런 것은 가식이 아니요 겸손이다.)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이들은 자신들도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일에 열중하기보다 남과의 비교에 초점을 맞춘다. 또 중심된 일에서 벗어나 비방과 공격에 초점을 맞춘다.)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도들은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곳에서 쫓기면 저곳으로 가고 저곳에서 쫓기면 그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 사명이란 이처럼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이다. 그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편안할 때 하고 힘들 때 안 하는 게 아니다.)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걸어본 적도 없는 앉은뱅이의 모습과 나는 무엇이 다른가? 나는 제대로 살아본 적이 있으며 제대로 존재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의 구원으로 내가 정상인의 모습을 갖기 시작했다.)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을 때 치유가 시작된다. 아무나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판단되지 않아도 하나님 보기에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판단될 때 치유가 된다. 따라서 전적인 믿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회복되고 구원되는 증거는 나의 발로 일어서서 걷는 것이다. 남의 발로 걷거나 남에게 의지하여 걷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일어나 걷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다른 것들과 착각하고 오해한다.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것과 섞으려고 한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역사를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려고 한다. 우상의 형상 안에 하나님을 집어넣고자 한다.)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헛된 일이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일들이다. 우리가 섬기는 모든 것들 심지어 습관까지도 헛된 것일 때가 많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즐길만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은 예수님 전세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세대에게는 자연 현상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는 말이다. 우리는 실제로 자연 현상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다.)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누구든지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사도들이 성령충만한 모습이 성경에서는 자연스레 느껴지나 일상에서 생각해 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일을 잘 했을 때 인간에게 칭찬받고 자신이 존경받고 싶다. 그런데 사도들은 자신들을 높이는 인간들을 보면서 애통해 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높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은 돌에 맞아 기절을 한 상태로 버려졌다.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렸을까? 그렇게 죽음을 경험하고도 소명을 버리지 않은 바울이 성경 속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된다. 나의 모습이 대체 어떠한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바울이 하루동안 정신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한 아무런 대응도 없고 비난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맞아 죽을 뻔했던 그 성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런 다음 되돌아 나오고 있다.)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다음 성에 오자마자 복음을 전한다. 아마도 치료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찢기고 멍든 채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던 에스더의 각오는 바울에 비하면 새발의 피가 된다. 에스더는 실제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으나 바울은 죽음을 체험하면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이 왜 위대한 전도자인가? 단지 이론만 밝고 말만 잘 했으면 위대한 전도자가 아닐 것이다. 물론 바울은 말도 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정말 위대한 존재인 이유는 이처럼 죽음을 무릅쓴 복음 전도를 몸소 실천했다는 것이다. 고통 받는 사역을 직접 몸으로 보여줬다. 말로만 떠드는 헛된 자가 아니라 죽음의 선을 넘나들면서 실천을 했기에 그의 복음이 위대했다. 제자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머물라고 말한다 해서 그 말이 제자들의 가슴을 울렸을 리는 없다. 멍들고 째지고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바울의 말은 힘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도 몸소 보여주고 있다.)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우리가 사람이나 무언가를 부탁할 때 흔히 사람에게 부탁하기 쉽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 부탁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관할하기 때문이다.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