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세상과 교회를 향해

식민지 지배와 하나님의 뜻

강 영 길 2014. 6. 13. 00:08

최근 국무총리 후보자가 된 문창극 씨의 역사관 문제가 세간의 관심이다.

그가 일제 식민 시대나 한국 전쟁은 우리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 새삼 문제가 되고 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을 어떻게 소화하는 게 좋을까?

 

첫째,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뤄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어떤 일에 대한 주권도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이 세상 모두를 주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대리로 인간을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가령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하나님이 조정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조정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의사를 존중하는 인격적인 분이다. 아론이 황금 송아지를 들고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한 것인 하나님이 시킨 일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은 하나님이 주관한 일보다 인간의 욕망이 주관한 일이 더 많다. 이런 점에서 마치 식민 시대나 한국 전쟁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해석하는 데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

 

둘째,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벌을 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인가? 일단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을 벌하곤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를 이유없이 벌하신 적은 없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상태가 최대의 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 당시만 해도 우리는 거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미 충분한 벌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이중으로 벌을 주는 무모하고 무자비한 분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손길을 보내신다. 그 좋은 예가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종종 벌하신 것은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지 못할 상태로 가는 것을 막기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 벌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다.

 

셋째,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온전히 사랑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징벌을 내리기보다는 사랑을 베푸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실제로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억압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시고 바빌론을 멸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깨우칠 목적으로 고난을 주셨으면 일본은 망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그 사건으로 망하지 않았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문창극 후보의 발언은 하나님의 뜻을 상당부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던질 질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시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커다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고통받는 것을 즐기지 않으신다.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으려고 요나를 니느웨까지 보내기도 했다. 들풀도 사랑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즐기실 리가 없다. 따라서 식민지나 전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는 하나님이심을 감안할 때 하나님이 그런 비참하고 비극적인 과정을 주실리가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문 후보의 논리라면 모든 나쁜 일은 다 하나님의 뜻일 텐데, 그것이야 말로 위험한 생각이다. 그러면 모든 불의와 부정도 다 하나님의 뜻이 될 텐데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 것인가? 우리는 믿는 자로서 영적 분별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지도 말고 곡해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문후보를 비롯하여 하나님을 자신들의 좁은 사고의 틀 속에 가두려는 어떠한 시도도 사탄의 짓일 가능성이 높다.

 

가장 중요한 명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