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 발광, 모세의 경이(출애굽기 10장 21-24)
(미국 유타주의 브라이스 캐니언)
자가 발광, 모세의 경이(출애굽기 10장 21-24)
미국의 브라이스 캐년이라는 계곡에 가면 기기묘묘한 붉은 바위가 천지에 널려 있다. 이 멋진 국립공원에 처음 당도하면 입이 벌어져 뭐라고 말을 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마치 땅은 붉은 한지로 만들어졌고 그 한지 속에 불을 켜놓은 듯한 황홀한 빛깔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조차 힘들다. 이 공원의 넓이는 서울시보다 넓으면 넓지 결코 좁지 않다. 이 넓은 공원 저체가 이런 절묘한 바위로 이뤄졌다. 가도가도 기묘한 바위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니 처음 이 공원에 들어섰을 때 입을 다물지 못했던 사람도 한동안 다니다 보면 감흥이 줄어든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그렇다고 처음의 감흥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때로는 이 공원의 바위처럼 감흥 없이 지나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너무 자주 들어서 습관적으로 보게 되는 장면이다. 다시 공원 이야기를 해보자.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익숙해지지만 그 넓은 공원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바위 사이 협곡으로 걷기 시작하면 바위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행간을 좀더 느끼면서 읽다 보면 참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한다. 그런 장면 중 하나가 출애굽기 10장 21절에서 24절 아닐까?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고 했다.
이 사건은 모세를 통해 내린 아홉 번째 징벌이다. 그동안 여러 번의 징벌을 봤으므로 성경을 읽는 우리로서는 애굽인들이 또 한 번 벌을 받는구나, 정도로 읽게 된다. 그러나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이날의 어둠은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깜깜한 어둠이다. 그래서 맹인처럼 손으로 더듬어야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어둠이다. 그런 어둠이 무려 사흘 동안 계속된 것이다. 별도 달도 없고 태양도 없는 어둠이 내린 것이다.
22절과 23절을 보자.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온 땅에 태양이 사라졌다. 사실 성경에서는 태양이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어둡게 했을까?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고센에는 빛이 있었다. 그러니까 태양은 떴다는 말이다. 한데 어떻게 한 동네에만 태양이 비칠 수 있을까? 한 동네만 빛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굳이 따져보자면 엄청난 먹구름이 끼었고 그 먹구름 사이로 빛을 보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먹구름은 사흘 동안 이동하지 않고 꼼짝 없이 서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도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빛을 주셨던 것이다. 사실 물리적인 것만 그런 게 아니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삶의 빛, 곧 소망이 없다. 믿는 자에게만 빛이 있고 소망이 있다. 믿지 않는 자의 삶은 흑암같은 구름이 끼어있고 믿는 자에게는 하늘의 소망인 빛이 있다. 열 가지 재앙에도 수많은 상징이 있는데 아홉 번째 장면도 바로 이러한 상징이다.
열 가지 재앙에는 모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우리의 삶의 근원이 나일강의 피처럼 붉게 된다. 식용수가 오염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갈 근원이 오염된다. 삶의 근원이 오염되면 그곳에서 살던 개구리가 뛰쳐나온다. 강에는 생명이 없어지고 그것들이 뛰어 나와 죽음으로써 내 삶에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그렇게 되면 더러운 파리와 이가 내 삶에 나타난다. 모든 병균이 생기고 몸이 가려워 견딜 수 없이 불결한 삶이 된다. 믿지 않으면 가축들이 죽는다. 즉 재산 중 동산을 탕진하게 된다. 우박과 같은 삶의 재앙이 내려서 남은 부동산, 재산을 또 망가뜨린다. 그 다음에는 메뚜기 즉 욕심을 채우려는 무리가 와서 남은 재산조차 가져가 버린다. 그렇게 되면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우리는 빠져든다. 삶의 희망인 빛도 사라진다. 최후에는 자신의 인생의 후계자인 장자가 죽음으로써 자기 인생의 역사가 끝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 구원이란 없다. 하나님이 내린 빛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죽음만 남을 뿐이다. 더 버티면 자기 목숨까지 잃어서 현생의 삶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바로는 그 직전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홉 번째 재앙인 어둠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있는 바로의 궁전과 애굽인의 동네에서 바로의 신하들이 모세를 찾아온다. 모든 것이 어둠인 상황이다. 바로는 궁전에서 횃불을 켜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민들은 등잔의 기름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바로와 모세 사이의 거리는 상당했을 것이다.
바로의 신하가 등을 켜고 어둠 속을 뚫고 모세를 찾아온다. 횃불이 밝아봐야 사방 십 미터를 밝히지도 못했을 테다. 그런 어둠을 뚫고 고센에 왔더니 이곳은 대낮같이 환하다. 그때 신하가 느꼈을 경이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신하는 설마 고센에만 빛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때 신하의 감탄이 얼마나 컸을까? 후일담이지만 이 신하는 동네방네 이 소문을 내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경탄이 꼬리를 물고 온 동네를 덮었을 것이다.
다시 신하는 모세를 대동하고 궁으로 돌아간다. 고센을 떠나자마자 밝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시작되었을 때 신하는 그 장면을 도저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눈으로 확인한 것을 안 믿을 수 없다. 또 신하 혼자 온 게 아니라 부하들도 함께 왔을 테니 모두들 웅성거리며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수군거렸을 것이다. 어떤 자는 공포에 떨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다시 궁으로 돌아갈 때 어둠을 대하는 장군의 마음에는 매우 큰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갔을까? 당연히 모세는 장군이 밝힌 등을 따라갔을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하가 와서 바로의 뜻을 전하고 먼저 갔고 모세는 아론과 몸단장을 하고서 바로에게 나갔을 것이다. 모세도 횃불을 들고 갔을까? 그러하다면 모세나 바로의 신하나 다를 바가 무엇일까?
모세가 궁으로 갈 때 깜깜한 무대 위에 선 가수가 혼자 조명을 받는 것처럼 한 줄기 빛이 하늘에 내려와 모세를 감쌌을 수도 있다. 모세만을 비쳤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더 큰 능력을 보여주시지 않았을까? 모세가 마치 형광물질처럼 자체발광을 했을 것이다. 모세 자신이 빛이 나서 사람들 사이와 동네를 유유히 걸어간다. 그때 사람들은 그 장면을 내다본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모세와 아론,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하나님의 사자, 이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광경인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물체가 얼마나 눈에 띄는지 우리는 다 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빛나는 법이다. 어둠이 깊으니 모세와 아론이 품어내는 빛은 전체 애굽 사람과 바로의 신하 모두가 보면서 경탄과 두려움의 소리를 질렀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갖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래야 한다. 모든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야 한다. 세상의 칠흑같은 어둠에서 홀로 빛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나타나면 세상이 모두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를 보면서 세상이 두려움과 경탄의 소리를 질러야 한다.
이런 모세를 본 사람들의 눈에는 모세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을까? 새까만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발광체, 이를 본 그들의 마음은 불가해한 하나님의 힘에 이미 눌려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24절을 보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바로는 모세가 오자마자 약속을 한다. 하지만 바로는 이런 엄청난 일을 보고도 조건부 약속을 한다. 인간은 이처럼 어리석다. 바로는 이어진 내용에서 모세에게 한 번 더 얼굴을 보이면 모세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인간은 공포에 떨면 오히려 공격적이 된다. 물론 바로는 다시 모세를 만나지만 모세를 죽이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눈으로 다 봤기 때문에 모세를 건드리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두려웠던 것이다. 모세가 두려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발광체, 나도 그것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