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나눔/축복하는 자녀교육

축복하는 자녀교육 3

강 영 길 2012. 1. 24. 17:20

II. 성경적 교육

 

 

1.내 자녀의 정체성

 

1)사랑으로 바라보기

부모는 아이들에게 정체성을 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보기 전에 부모가 아이들을 어떤 정체로 볼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이가 울면서 집에 왔다.

“너 왜 그렇게 우니?”

“엄마 애들이 나더러 머리가 크다고 놀려요.”

“그래? 그 아이들 말은 들을 것도 없다. 걱정 마라, 네 머리는 전혀 크지 않으니까. 그런 말에는 신경 쓰지 말고 내 심부름이나 좀 해다오.”

“어떤 심부름요?”

“가서 감자 좀 사 오너라.”

“알았어요. 바구니를 주세요.”

“얜, 바구니가 왜 필요하니? 네 모자에 담아오렴.”

이 어머니는 말로는 머리가 크기 않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이의 머리가 크다고 믿고 있다. 많은 경우 이 어머니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한다.

옛 어른들 내 자식아 내 새끼야,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그 말 속에는 진지하고 깊은 사랑이 배있다. 내 속으로 나은 내 자식이라는 깊디 깊은 사랑이 깔린 말이다. 하지만 요즘 이런 말을 듣기가 쉽지는 않다. 많은 경우 언어는 사고와 심리를 반영한다. 많은 부모가 자식들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렸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기보다 기능으로 키우려고 한다. 따라서 자식을 능력이나 재능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내 새끼야, 내 사식아, 이런 사랑에 담금질 된 언어가 구사되지 않는 것이다.

 

 

2)아이는 그저 아이가 아니라 소중한 생명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죽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도 죽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보듯이 우리도 그들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작품이란 헬라어로 poema, 영어 poem의 어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쓴 한 편의 시이다. 우리 모두가 한 편의 시라는 것이 얼마나 환상적인 말인가? 나는 물론 우리 아이들은 각기 하나님이 쓴 한 편의 시이며 그것도 명작 시이다.

따라서 각 사람에 대한 저작권을 하나님이 갖고 있다. 아이들 고치는 것도 시인인 하나님 몫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고칠 수 없고, 우리가 타인을 고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어느 시인의 시를 마음대로 고치거나 인용하면 벌금을 물거나 감옥을 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마음대로 아이들을 다뤄서는 안 된다. 그저 소중한 생명체라는 가치를 인정해야 할 뿐이다.

우리 말에 다스리다라는 단어는 사랑하다와 어원이 같다. 둘 다 다다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이를 다스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이 다스리다의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사랑할 때는 다스리듯이 다스릴 때는 사랑하듯이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할 때는 다스리려 하면서도 다스릴 때는 사랑하려고 하진 않는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내 아이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가장 존귀한 아들이며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 것 이상의 정체성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