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년과의 쪽지 대화 4-초대교회와 다른 오늘의 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오늘은 자매님이 질문한 내용 중 두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예화 설교와 헌금설교의 문제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자매님께서 조금 인내심을 발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칫 전반부의 내용이 자매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각도의 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결정적인 내용이 헌금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에 관하 무려 1200회가 넘는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물질 문제는 우리를 넘어지기 쉽게 합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과 교회를 비판하면서 헌금 문제로 비판을 할까요? 그들이 바로 물질주의자임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많은 설교가 있습니다. 전체 설교중에 헌금에 관한 설교가 몇 퍼센트나 될까요? 나는 목사도 아니고 교회 운영자도 아니지만 헌금에 대한 설교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회가 헌금에 대한 설교를 떳떳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헌금을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이 축복하겠다는 말은 즐겨 들으면서 하나님께 헌금하라는 말만은 빼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둘 다 들어있습니다. 헌금을 하라는 것도 들어있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그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 곧잘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하기도 하고 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원할 때 곧잘 하나님의 말씀을 건너뛰려고 합니다. 이처럼 과장도 잘 하고 건너뛰기도 잘 하는 대표적인 것이 헌금에 대한 것이라고 봅니다.
목사님은 교인의 눈치가 보여서 헌금 이야기를 잘 못하죠. 헌금을 걷는 것도 이제는 아예 표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눈이 두려운 게 아니고 사람의 눈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교회가 더 문제라고 봅니다.
거꾸로 교인들은 어떨까요? 헌금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를 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요? 하나님은 이 세계를 다 가진 분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님은 헌금이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내가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 백배의 보답을 하십니다. 만일 이 말에 일말의 의심이 간다면 한 번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온전히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갚으십니다.
왜 헌금에 대한 설교가 자꾸 귀에 들어올까요? 감기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코가 막히지 않습니다. 코가 있는지 느끼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감기에 걸린 순간부터 내 신체에 코가 달렸다는 것이 너무나 절실히 느껴집니다. 헌금에 대한 설교가 귀에 거슬리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이 결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자매님을 꾸짖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곧 성경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신명기 7장에서 8장까지 보셔도 좋고 창세기를 읽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늘 자신을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목적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내 모든 것으로 합니다. 내 모든 것에 헌금만 쏙 빠져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을 포기할 때 진정한 축복이 시작됩니다.
자, 그럼 정말로 목사님들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돈 자체에 목적을 두고 헌금을 강요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쓰이는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 교회가 헌신할 만한 교회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돈을 거두는 데 목적을 둔 목사님이 있습니다. 또 때로는 잘못 쓰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나가되 다른 교회나 선교단체에 헌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러한 판단을 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판단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권위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함부로 옮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옮기는 것은 내가 은혜받고자 옮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더 헌신하려고 옮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순종의 길입니다.
둘째, 헌금을 하기 싫어서, 내 돈이 아까워서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목사님의 태도가 문제라면 그 목사님 교회에 헌금하지 않더라도 다른 곳에 반드시 헌금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내것을 아무것도 바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축복만 받으려 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축복을 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예화 설교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어느 모임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두고 묵상을 했습니다. 저는 글쟁이답게 꽃송이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여 놓으며 이런 저런 묵상을 했지요. 제 묵상 나눔이 끝나자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잠시 후 아주 어눌하고 연세있으신 분이 단위에 올라서 묵상 나눔을 했습니다. 그분은 말도 잘 못했고 보잘 것 없어보였죠. 그분은 장미 꽃을 놓고 다른 긴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6장을 인용했죠.
"들판의 꽃도 돌보는 내가 너희를 돌보지 않겠느냐."는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그분의 묵상 끝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없었습니다.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상 아름다운 묵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뛰어난 지식을 가져도 성경에 쓰인 한 구절의 진리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사님들이 세상적인 예화를 들어 설교하는 것은 썩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과거엔 세상 지식과 권위자, 학자의 말을 들어가면서 설교하는 목사님이 위대하고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발견한 깊은 묵상을 하는 목사님이 가장 멋집니다. 그런 설교가 좋습니다. 따라서 설교를 들을 때면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 거의 눈치를 챕니다.
저 목사님이 묵상을 깊이 하는지 안 하는지, 너무 쉽게 보입니다. 묵상의 깊이야 말로 성도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러나 예화 설교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예화에서 자기 모습과 자기 경우를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던 사울을 몇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를 비판할 수 없습니다. 팩트, 즉 사실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팩트조차 말하면 안 됩니다.
목사님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설교도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자매님이 그 설교에 관여하고 싶다면 그 목사님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그 목사님을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될 때 목사님게 편지를 쓰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나는 이런 설교가 마음을 어렵게 합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지요. 그 분을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하나님께 맡기시는 게 우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답이 너무 띄엄띄엄 가서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쁜 탓에 글 쓰기가 그리 녹녹하진 않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충실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메일을 보면서 더 질문이 생기시면 또 하시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자매님께 답하면서 제 신앙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도 되어서 감사합니다.
답장까지 시간이 좀 걸리니 인내심을 발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