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분별, 겸손과 영적 전쟁의 경계는 어디인가? 2
오늘의 교회 구성원에 대하여 환자와 신자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 교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초청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사람들이 쓰리고 아픈 상처를 안고 하나님을 찾아온다.
그들의 많은 사람이 환자다.
그들 대다수는 쓴뿌리를 갖고 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다시 쓴뿌리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쓴뿌리를 가진 사람에게 동조를 한다.
그리하여 정작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을 코너에 모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사건에 부딪쳐서 생각할 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세사람의 대화를 살펴보자.
갑:을아 네 얼굴에 뾰루지가 있네. 정말 축하해. 멋진 뾰루지가 생겨서.
을:응 꽤 불편해. 그래도 그냥 참을만해. 멋져 보이니?
갑:그럼 넌 멋져. 뾰루지가 정말 잘 생겼네. 넌 그 뾰루지 때문에 더 멋있어. 그러니 뾰루지 절대 없애지마.
을:뾰루지 때문에 정말 아픈데, 이것을 치료하지 말라고?
갑:아냐, 누구나 뾰루지는 나는 거지. 특히 너는 뾰루지가 정말 멋지다.
을:그래 고마워. 역시 넌 나를 정말 사랑하는 친구구나.
병:난 그렇게 생각 안해. 뾰루지는 꽤 아프고 불편해. 그러니 연고를 발라. 이번에 새로 나온 예수님표 연고는 정말 좋대.
바를 땐 아프지만 바르기만 하면 낫는데.
을:뭐라구? 넌 내 뾰루지가 그렇게 싫으니? 아냐. 넌 뭐든지 내가 미워보이는 거지?
병:그게 아니구 난 정말 네 얼굴이 더 예뻐지길 바라는 거야. 네 얼굴이 얼마나 예쁜 얼굴이니?
을:됐어. 넌 날 비난하고 싶은 거야.
갑:맞아, 그냥 뾰루지 있는 대로도 다 사랑받고 살아. 좀 불편한 게 어때서 그래? 병아, 넌 정말 못 됐구나. 왜 친구를 미워하니?
병:음......그게 아니고 을이 치료되면 더 좋으니까.
갑:저런 애들은 꼭 저렇게 말하더라. 을아, 너 뾰루지 나서 정말 잘 됐다. 축하해.
을:그래, 고마워. 역시 너밖에 친구가 없다.
세사람의 대화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다.
을에게는 치료할 문제가 있다. 동시에 을은 마음도 조금 비뚤려 있다.
갑은 을의 문제를 무조건 칭찬을 한다. 그리고 그게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갑은 마치 을이 힘든 것을 내심 좋아하는 것이다.
을이 잘 안 풀리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저의는 숨기고 겉으로 칭찬한다.
상대의 문제가 잘 된 거라고 말하는 게 어떻게 사랑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병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을의 문제가 고쳐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하지만 갑은 병을 비난하면서 을의 환심을 산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충고가 진정한 사랑인것처럼 말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갑의 사랑은 왜곡된 사랑이고 병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동의하길 싫어한다.
병원에 가는 과정이 귀찮고 힘들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진정한 애정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아프기 때문에
차라리 진정한 사랑을 거부한다.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분별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분별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잘 못이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비록 네가 잘못된 길을 걸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너의 길을 회개하고 돌아와야 나의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많은 환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려한다.
왜곡된 사랑의 확신은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이용하고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확인한다.
상대의 아픔을 축하해주는 것이 사랑일까.
상대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과 축하하는 건 다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못된 문제를 보고도 모르는 척 한다.
성경에서 상대를 정죄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죄와 사랑의 충고는 분명히 다르다.
정죄는 상대를 훈계하는 거지만
사랑의 충고는 분별있는 눈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미가야 선지자가 400명의 선지자와 다른 의견을 목숨을 걸고 내 놓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에서 사이좋게 지내려고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말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옳지 않다.
비판은 하지 말자. 하지만 성경에 의거한 말씀은 전하자.
성도가 죄악의 길에 빠진 상태라면 그것을 건져주려고 팔을 내미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다.
사랑은 영적 분별력을 가진 차원높은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