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분별, 겸손과 영적 전쟁의 경계는 어디인가? 3
의심이 없으면 교만이라는 말이 있다.
정말 훌륭한 말이다.
성령운동을 하는 곳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늘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자기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상대의 반대 의견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만일 듣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면 폭발적으로 화를 내고
분노가 치밀어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하고 만다.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듣는 분들이
"너희가 먼저 섬기라."는 말을 왜 못 듣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첫번째 대중에게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에는 귀기울이지 않으면서
자신은 성령과 함께 운행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우선은 그 성령이 진짜 성령인가를 의심해 봐야 한다.
성경에서 인간이 물으면 하나님은 늘 친절하게 대답하신다.
언제 질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화를 내신 적 있던가?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성령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하는 그들,
그들은 왜 지체의 질문에 폭발적인 분노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성령님,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면 그들에게 설령 반대 의견을 내도 결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질문을 받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 어떤 사람의 질문에도 화를 내지 않으셨다.
따라서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타인이 문제를 제기 했을 때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
본인이 착각을 했거나 사탄의 역사일 수도 있다.
둘째는 설령 그게 진짜 성령의 음성이라고 할지라도 덕이 되긴 어렵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으되 그 믿음이 믿는자에게조차 해가 된다면
그야말로 상대를 실족시키는 범죄를 저지르는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지 네가 들은 말씀을 자랑하고 싸우라고 하지 않으셨다.
먼저 의심해야 한다. 나를 의심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의 음성인지 먼저 의심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교만이다.
하나님 이 낮은 저를 통해 하신 말씀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요? 라고 물어야 한다.
만일 그런 태도가 없는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 거라고 말한다면
영적 전쟁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지체를 사랑하고 섬기는 도를 보이지 않으면서 내 말은 하나님 음성이니 내 말을 들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단의 역사일 수 있다.
그런 자들에게는 대적 기도가 필요하다.
사탄을 사랑해야 하는가?
사탄을 보면 우리는 대적을 해야 하고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한다.
그것이 영적 전쟁이다.
전쟁은 승리를 위해 벌이는 것이다.
사탄의 역사라고 판단될 때조차 사랑으로 덮어야 한다면 기독교가 설 자리는 없다.
예수님이 결코 사탄을 사랑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탄의 역사를 어떻게 알아볼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는 말들 중에서 성취되지도 않는 것들은 사탄의 역사일 수 있다.
또 우리가 가진 신앙 즉 성경적 진리의 보편적 상식에서 어긋날 때도 의심해 봐야 한다.
특히 그 자신만이 옳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전혀 의심없는 독선,
섬김이 없는 자기 자랑 등은 사탄의 역사일 수 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조차 물론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영까지 사랑해선 안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탄의 역사를 품는 실수를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범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확인이 없고
단지 정죄하지 말라거나, 천국에 대한 약속을 확고히 하고 싶어서
아무것이나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입에 넣는다.
많은 교회가 이 어린아이의 태도로 사람들을 품는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나쁜 것을 쥐었을 때 그 아이를 야단쳐서 다시 그것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다.
만일 그 아이를 그냥 놓아두면 아이는 죽을 수도 있다.
교회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악한 영이 떠나도록 대적해야 한다.
철없는 아이들은 불을 지르고도 서로 좋아한다.
둘다 어리기 때문이다.
조금만 철이 들어도 한 명이 나머지 한 명에게 불을 지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환자인 신자에게 동조하면서 그게 사랑이라고 섣부른 말을 하는 교회나 공동체는
불지르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공동체요 성도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분별있는 사랑을 하고
의심있는 겸손의 자세로
악한 것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이 다 좋다고 말하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이거나 믿음이 없거나 혹은 잘못된 믿음을 올바른 믿음으로 착각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올바른 분별력이 있는 공동체가 훌륭한 공동체가 될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미가야 선지자의 용감한 태도
혹은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태도를 기억하며 사는 것이 차원 높은 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