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묵상하는 하루

믿음의 형제를 위해 얼마나 힘쓰는가?(데살로니가 전서 3:8)

강 영 길 2011. 12. 4. 22:14

우리는 신앙 공동체 사람들을 형제 자매라 부른다.

친 형제 자매의 관계는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나누는 관계요

모든 것을 시시콜콜 아는 관계다.

피부의 어디에 점이 있고 어디에 흉이 있으며 그 흉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참으로 자세한 것까지 알고 지낸다.

 

내 외숙모는 참으로 사람 좋은 분이다.

세상에 심성 곱기로는 이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그 착한 외숙모가 간경변으로 심히 어려운 상황에 있다.

사경을 헤매는 외숙모를 간호하는 사람은 외숙모의 막내 여동생이다.

외숙모는 완전히 인사불성인 상태가 된 적이 있다.

하루는 스무 번이 넘게 병원 침상에 대변을 봤다고 한다.

외숙모의 동생은 그 변을 모두 치우면서도 언니를 걱정해서 종일 울고불고 했다고 한다.

만일 그 분이 외숙모의 친동생이 아니었더라도 그런 정성을 들일 수 있었을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친형제가 가난하면 아무 조건없이 먹을 것을 나눠주며

친형제가 아프면 이처럼 밤을 새며 온갖 궂은 일까지 간호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을 나누는 형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형제인 것처럼, 혹은 자매인 것처럼 살아가는지 모른다.

단지 형제 자매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형제 자매라는 단어를 아무런 감동 없이 사용해 버리고 만다.

때로는 이 말을 쓰는 자체로 스스로 만족하면서 마치 실제로 사랑하고 사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3장 8절을 보다가 숨이 막혀서 한동안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It gives us new life to know that you are standing firm in the Lord.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여러분이 주 안에서 굳게 서 있다니 우리가 이제 살 것 같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굳게 서기를 얼마나 바랐을까?

우리가 엄청난 긴장을 했다가 긴장감이 풀어졌을 때 하는 말이 이젠 좀 살 것같다는 말을 한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 것을 보니 이제는 살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죽을 만큼 원했다는 말이 된다.

이 얼마나 지독한 형제애인가?

얼마나 형제를 사랑했으면 그들의 올바른 신앙을 죽을 만큼 바랐던 것일까?

 

나는 내 지체들,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믿음의 동지들을 죽을 만큼 사랑하는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죽을 만큼 돕는가?

적어도 그들을 위해 죽을 만큼 기도하는가?

 

내 형제 자매들이 주 안에 굳게 서기 위해서

나는 죽을만큼 기도해야 하고 또 내 몸과 마음을 바쳐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가 누구이건, 어떤 사람이건, 단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만으로.

좀처럼 편안한 숨을 쉴 수가 없다.

내가 지체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편안한 숨을 쉴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