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나눔/효과적인 의사소통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강 영 길 2012. 7. 10. 18:08

최근 어느 형제와 대화를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선 느낌을 받았다.

 

이 형제의 아들이 미국에서 진학을 하고자 했는데 결국 떨어져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상황이다. 그래서 그 아들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 미국으로 대학을 갈 수 있으니 그냥 한국으로 오는 것도 좋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학 입시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어떤 학생의 입학 원서를 써 주었는데 그  학생에 미국의 명문대에 붙었다. 그런데 그 입학원서의 내용이 100프로 사실은 아니고 종종 픽션도 들어갔다. 원칙을 따지자면 사실 그대로 써야 하겠지만 알고 보면 완전한 사실만을 쓰는 글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가 벽에 부딪쳤다.

 

그 형제는 내가 그 학생을 도와주면서 돈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내가 써주는 게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돈을 받은 적이 없고 요구한 적도 없으며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다. 단지 학생의 부모와 친해서 도와줬을 뿐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사실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별로 높지 않은지 모른다. 나는 음악가가 자존심을 살리느라 훌륭한 콘서트 홀에서만 연주하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은 대중 앞에서도 연주할 수 있고 지나가는 아이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서도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음악가가 오히려 위대해 보인다. 그 음악가의 자존심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갑작스런 '작가의 자존심'에 대해서는 할 말을 준비하지 못했다.

하지만 작가의 자존심과는 무관한 것같은데 그게 나의 작가로서의 삶을 무너뜨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니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도 나의 작가적인 양심에 의심을 품을 지 모른다.

 

이 형제는 결국 내가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 이야기를 조금 했다. 기생 라합도 거짓말을 하여 이스라엘을 도왔다. 성경에서는 궁극적인 선을 위해 의로운 거짓말을 할 때가 있었다고 했다. 또 사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여러 가지 사역을 한 것은 율법으로 보면 큰일 날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면서도 사역을 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율법을 어긴 것일까?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했기에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했다. 그것이 궁긍적으로 인간에 대한 긍휼을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율법보다 그것이 위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독교의 기본은 도덕이 아니라 사랑이다. 출발점도 그렇다. 내가 불법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 한 해상 구조요원이 인명을 구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구조요원은 자기들의 구역 밖에서 조난당한 사람을 구했으므로 법을 어겼고 따라서 해고를 당했다. 그 구조대원은 법을 어기지 않았으면 해고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나 그랬으면 사람이 죽어야 했다.

 

나도 완전한 사실만을 써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적인 자존심 문제에 걸리므로 안 써줄 수도 있다. 또 완전한 사실이 아니면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고 그 학부모에게 핀잔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써준 것은 그 분의 간절함 때문이며 그 아이의 간절함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앞으로 이 사건을 통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돈을 받고 써준 것도 아닌데 그 것을 도와주는 것이 과연 잘못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떻든 그 형제의 지적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도 더 고민하고 회개할 부분은 회개할 것이다.

 

그 형제와 두어 차례 의견을 주고 받았다.

형제:사실이 아닌 것을 쓰는 건 문제가 있지 않아요?

나:(사실을 도덕적으로 따지자면 형제의 말이 맞으므로 유구무언이라) 글쎄요....

형제:작가로서 그런 것을 써도 되는 건지 생각해 봐야 할 것같아요.

나:글쎄, 작가하고 무관한 것 같기는 한데요. 정말로 그게 문제일까요?

형제:난 노코멘트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끝내고 우린 헤어졌다.

 

난 노코멘트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이 참 무섭게 들렸다. 아니 무거웠다.

본인이 할 말을 다 하고선 노코멘트다,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대화가 아니다.

그 대화의 의도는 "너는 확실히 틀렸으니 내가 더 말할 것은 없으니 너 혼자 잘 생각해서 깨달아라."라고 말한 것이다.

 

어쩌면 그 형제는 자신이 더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겸손에서 그렇게 말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런 태도라면 상대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그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야 하며 설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니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런 대화가 좋다. 당신 생각해 보세요,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좋다. 그러면 상대도 생각하게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위대한 명제가 있다.

"이 세상에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다. 바로 당신 자신이다."

 

난 할 말 다 했으니 더 이상 말 시키지 말고 네가 왜 틀렸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태도는 상대로 하여금 좌절감과 거절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은 어떤 의도로 말했건 그 대화의 결과가 감정으로 남으면 안 된다.

사실 이 형제가 전에도 이와 동일한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이 형제의 언어나 태도의 습관인 것같다. 자신의 습관이나 태도가 자신의 할말을 끝으로 상대의 말을 끊어버리고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살인과 같다.

 

말은 생명을 주기도 하고 죽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