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목)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묵상
이 본문은 읽는 자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먼저 20절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항하며 죄를 짓고 살아왔다. 그런데 죄를 짓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2절처럼 모두가 다 탄식하여 고통을 겪는다. 그것은 단지 구원받지 못한 자만이 아니라 23절처럼 성령의 열매를 얻은 사도들조차 탄식하고 고통받는다. 성령의 열매를 얻은 자들도 탄식하면서 몸이 자유롭길 원하고 있으니 나같은 존재는 얼마나 힘들겠는가? 하지만 나도 사도들처럼 되고 그 이상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고통중에 바라는 것이 19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1절에서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사망과 썩어짐의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영광임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영광스런 일은 ‘보이지 않는’ 소망이라고 24절에서 말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이미 이뤄진 것이다. 이뤄진 것을 소망할 이유는 없다. 이뤄지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강조할 이유가 없는 말이다.
그 소망이 간절하고 진실하다면 25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 18절로 돌아간다. 그것은 현실의 고난인데 장차 나타날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18절이 결론이고 나머지 부분이 18절을 위한 전제가 된다.
고난에는 하나님이 주는 고난과 인간의 욕망이나 사탄의 역사로 인한 고난이 있다. 하나님이 주는 고난은 시련이고 인간과 사탄이 주는 것은 유혹이다. 많은 사람들은 유혹이 고난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고난은 유혹이 아니라 시련이다.
우리가 시련을 받는 것은 거룩한 시련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의 시련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구별되기 위한 시련이라는 말이다.
지금 내가 받는 시련은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영광에 비교조차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지금 보이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한 순간씩이라도 미시적인 눈을 제거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을 하기로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 > 묵상하는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어드리기(로마서 12:1-2) (0) | 2012.01.09 |
---|---|
아들이 된 머슴(로마서 9장 25-33) (0) | 2012.01.03 |
가장 익숙한 죄(로마서 8장 1-11) (0) | 2011.12.27 |
2012년 1월 큐티순서 (0) | 2011.12.26 |
경배하라(마태복음 2:1-8) (0) | 2011.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