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예수님이 세 번째 나타나셨다. 이미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여러 이적을 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에는 제자들과 늘 함께 다녔으나 이제는 그러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기 위해 훈련을 시키고 계신다.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있을 때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제 길을 가지 않을 때 나타나서 길을 바로 잡아 주신다. 예수님이 잠시만 떠나도 제자들은 갈 길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곤 한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시차를 두고 나타나시면서 길을 잡아준다. 내가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종종 내 삶을 지켜보시다가 잘못 가고 있을 때는 바로잡아주신다. 예수님이 관망할 때 내 신앙이 어떤 모습인지를 볼 수 있다.)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제자들은 어느새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예수님을 전하러 간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순간을 금방 잊고 세속적인 삶으로 돌아간다. 자기 소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 문제에 곧 집착한다. 이는 세속적 직업을 갖는 게 그르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다.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므로 이들은 생업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전도자로 나서야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소명과 달리 현실로 들어가고 만다. 소명에 따르는 않는 삶은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삶이다. 설령 그들이 고기를 잡았다고 해도 그것은 허황한 일에 불과하다. 소명을 감당할 때만이 잡는 것이 있다. 즉 열매가 있다.)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이 내 삶의 현장을 지켜보신다. 지켜보고 계셔도 사람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을 떠나 생활로 돌아가면 그 삶은 허황하다. 마치 빈 그물을 잡은 어부의 마음처럼 쓸쓸하고 공허함만 남아있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님은 전에도 이러한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동일한 과정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다. 그때는 제자로 삼는 과정이었으나 이제는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 과정이다. 과거의 체험과 지식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확인시키신다. 때때로 잊어버리는 것들 알고도 놓치는 것들에 대해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처럼 친절하게 확인시키고 다시 돌이키게 하신다.)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베드로의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통은 배로 저어갈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사이를 참지 않고 헤엄쳐 간다.)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부활하셔서도 제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다. 또 제자들에게 이런 저런 가르침을 주기보다 밤새 일한 제자들을 위해 먼저 식탁을 준비하시고 밥을 먹게 하신다. 예수님은 늘 우리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시고 우리가 베고플 때는 손수 불을 넣어서 밥까지 준비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열매 맺은 것을 함께 나누길 원하신다. 우리가 노력해도 안 된 것을 예수님이 말씀으로 주셨다. 그렇게 받은 것은 주님이 주신 은혜요 축복이다. 그 축복의 결과를 가져와서 함께 나누자고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해서 얻은 것을 가져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주셨으니 다 가져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가져오라고 하지 않고 조금만 가져오라고 했다.)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잡은 물고기가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만한 무게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신앙의 열매가 많아도 결코 과부하가 걸리지 않음을 상징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 넘치는 열매를 맺어도 그 열매는 결코 과하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열매는 늘 안전하다.)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예수님은 식사 전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다. 다들 밥을 먹고 배부르게 되자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나의 필요를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고 상대의 관심을 먼저 채워줘야 한다. 그런 다음에 내가 할 말도 하고 내 필요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예수님은 다른 복잡한 말을 묻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했다. 사실 이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그 사랑이 진실이라면 사랑하는 자의 말을 가벼이 들을 리가 없다. 그러니 그동안 예수님이 말했던 모든 것을 준수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베드로야 너의 사명을 아느냐고 묻기보다는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된다. 그 질문에는 모든 게 다 담겨있다. 또 베드로야 라고 말하지 않고 요한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 가게를 부름으로써 가계의 명예를 건 대답이 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의 진정으로 대답을 하라는 요구를 한 셈이다. 요한의 가문을 걸고 대답해 보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보다 절실한 대답이 있을까? 베드로는 최고의 사랑을 표현했다. 나의 사랑을 예수님이 알고 계십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신감과 당당함, 그리고 그 충만함이 베드로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한다. 지금 물고기 잡으러 가지 말고 이제는 어린양을 먹이라고 한 것이다. 베드로가 갈 곳 모른 채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을 두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 일을 그만두고 내 일을 하라고 한다. 예전에 예수님은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고 이번에는 어린 양을 먹이라고 했다. 나를 사랑한다면 네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내 소명을 따라 살라는 말이다.)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베드로의 분명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동일한 질문을 한다. 베드로도 똑 같은 대답을 한다. 베드로가 객기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진정으로 말하기를 예수님이 나의 사랑을 아시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충만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답할 수 있도록 나의 사랑을 키워야 한다.)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이번에도 확인을 했다. 이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그에 응한 질문일 수 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에 마치 각인을 하듯이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가 다시 돌아서지 않도록 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말하는 동안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에 성령 사역을 하였을 것이다. 기름붓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선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이미 자신의 부인한 과거가 있으므로 오히려 근심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진실성이 통하지 않을지에 대해서도 근심했을 것이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가 젊어서는 사방으로 다닐 수 있었으되 나이가 들면 고초를 당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미래를 보시고 그렇게 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확증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고 있다.)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한 것은 단지 나의 말을 따르라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죽은 것처럼 너도 죽게 될 텐데 그 길을 따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는 이 순간에도 다른 제자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나는 주님을 따르는 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서로를 비교한다. 베드로도 그러한 비교를 하고 있다. 혹시 저 사람은 나보다 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닐까? 혹시 저 사람은 나보다 더 큰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민을 한다.)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명확한 답변을 하신다.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를 어떤 대우를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예수님은 오직 각자가 맡은 소명을 행하라고 한다. 그가 무엇을 하건 너는 십자가를 지라고 한다. 그가 어떤 자라고 할지라도 너는 죽으라고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길이며 믿는 자가 지킬 유일한 길이다.)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예수님이 한 말의 뜻을 이렇게 쉽게 곡해할 수 있다. 3년씩이나 매일 같이 산 제자들이 직접 듣고도 그 말을 잘못 전달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뜻을 쉽게 오해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님을 기대서 물은 자요 요한이요 지금 베드로가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은 자도 요한이다. 베드로가 요한을 질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은 어떻게 하고 자기만 따르느냐고 물은 것이다. 혹시 요한만 더 편안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닌지 혹은 요한에게는 소명이 없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그런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상관치 말고 자기 할 일만 하라고 하신 것이다.)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결국 예수님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이를 다시 둘로 줄이면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자는 내 양을 먹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를 따라 죽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그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게 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도록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예수를 믿는 자의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