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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나눔, 오병이어의 기적(마태복음 14장 15-21절)

강 영 길 2012. 1. 31. 13:35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빈 들이요 해가 이미 저물었다. 들판에서 해가 지면 어둠이 급속도로 찾아온다. 불과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두워져 버린다. 하늘에 달이 있다는 이야기도 없고 이어지는 물 위를 걷는 사건에서도 달이 떴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어두운 밤이었음에 틀림없다. 날은 어둡고 먹을 것은 없으니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모습이다. 이 구원 받기 전의 불쌍한 사람들이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이 오병이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5천명을 먹인 사건이다. 

 

가족을 포함하면 적어도 3만명은 되지 않았을까? 어디에든 종교적인 모임에는 여성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음에 틀림없다. 당시로선 다산 풍속이 있었으니 엄마들은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아이를 데리고 나왔으리라 추측이 된다. 그러면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하면 최소한 2만명, 많게는 4만명의 인구까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중간인 3만명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선 예수님은 축복만 했다.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빵을 더 만들어달라는 말도 않았고 오천명을 먹게 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축복하고 떼어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축복의 힘이다. 축복은 능력이요 축복은 기적을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의 말을 반복적으로 할 이유가 있다.

 

예수님이 축복하기 전에 먹을 것을 찾으니 아이가 들고온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 아이가 들고온 음식이라면 결코 큰 빵이나 물고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빵은 아이의 한 끼 음식 정도에 해당하는 작은 빵 다섯 개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 어촌에도 있는 것처럼 말린 물고기를 쪄서 가져왔을 것 같다. 젖은 물고기를 들고오긴 어려웠을 테니까.

 

기적은 놀랍게도 아이가 자기 먹을 것을 예수님께 드린 데서 시작된다.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자기 먹을 것을 내 놓지 않겠노라고 떼를 쓰고 응석을 부리지 않았을까? 심지어는 제자들이 가져가기 전에 얼른 먹어버렸을 수도 있다. 만일 아이가 먹어버렸다면 그 빵은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냥 한 사람이 먹을 빵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이 그렇다. 혼자 먹으면 혼자 배부르고 끝나되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한데 그 어린 아이가 그 먹을 것을 내 놓았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내 놓았을 것이다. 아이는 기적을 바라고 내놓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리라고 내놓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내 놓자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데서 출발한다. 내가 먹을 권리를 포기할 때 하나님의 기적은 시작된다. 기적을 바랐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때 기적은 시작된다.

 

예수님이 축복을 하고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서 주셨다. 다섯개의 빵을 왜 쪼개서 주었을까? 제자는 열둘이고 빵을 받을 사람은 삼만명이다. 일일이 나눠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손도 부족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배를 해 준다. 그런데 제자들 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분명히 예수님이 빵을 나눠주셨는데 똑 같은 빵이 열개로 늘어난 것이다. 제자들은 눈위 휘둥그레졌다.

 

그 다음 제자들은 빵을 떼서 나눠주기 시작한다. 원래도 작은 빵이었는데 그 빵을 제자들이 큼직하게 잘라서 나눠줬을리는 없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눠줬을 것이다. 이것으로 도저히 3만명을 먹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의심을 하면서, 예수님은 왜 이런 허무맹랑한 짓을 시킬까 고민하면서 나눠줬을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나눠줬다. 그런데 웬일인가? 빵이 작아지질 않는다. 다섯 번 여섯 번 반복해서 빵을 나눠주면서 관찰하던 제자들에게 자신감이 생기고 믿음이 생긴다. 그래서 제자들은 빵을 점점 크게 떼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인간의 믿음의 성장을 상징한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시작한 어떤 일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점점 큰 믿음을 갖고 과감한 실천을 하기 시작한다.

제자들도 이제는 부족할 것인가를 더이상 걱정하지 않으면서 빵을 떼기 시작한다.

 

그러나 열 두 명이 3만명에게 빵을 나눠주기에는 시간도 일손도 부족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일꾼은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듯이 빵을 나눠주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이 빵이 줄지 않는 역사를 경험했듯이 빵을 하나 받은 엄마가 아이에게 빵을 나눠주었는데 자기 빵이 줄지 않는 것을 경험했을 테고 아이가 아버지에게 빵을 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빵이 줄지 않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놀람과 찬양과 기도가 저절로 나왔을 것이다. 놀라서 소리를 지른 사람, 감격해서 우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감격에 겨워 그 빵만 바라보고 눈물짓고 있었을 것이며 그 빵을 본 순간 병이 나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70인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밥상을 받았던 그 감격이 회중들 가운데 일어났을 것이다.

 

자기 빵을 나눠줘도 줄어들지 않자 그 경험이 너무나 신기해서 빵을 나눠누고 나눠준다. 여기 저기서 빵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만일 받은 사람이 먹어버리면 먹은 순간 그 빵은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빵을 나눠주는 사람은 계속적인 기적을 체험한다. 이것도 하나님 나라의 논리다. 빵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축복의 기도를 했을 것이다. 나눠주는 사람에게 축복하고 빵에게 축복하고.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빵을 떼어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처음에 빵을 조금 받았던 사람들은 그 빵을 먹어버렸겠지만 이웃들의 빵이 줄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자기들도 다시 달라고 하여 그 빵을 남에게 나눠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빵이 다시 기적을 일으킨다. 이것은 신앙의 파급효과다. 처음에는 자기 배만 채우던 사람들이 주변에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하면서 다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무 둥치같다. 빵을 나눠주는 과정이 처음에는 하나의 빵을 쪼개면 두개가 되고 두개가 네개가 되는것이 마치 나무 기둥에서 두 가지로 뻗고 다시 두 가지가 되고 다시 두 가지로 뻗어나는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의 원리같다. 하나의 소문이 두개의 소문이 되고 두개의 소문이 네개의 소문이 되고 네개의 소문이 여덟개, 여덟개가 열여섯 개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같다. 예수님은 벌써 소셜 네트워크의 힘을 알았던 것일까?

 

처음에 빵을 나눠줄 때는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서로 빵을 받고 싶어했을 것이다. 은혜가 적을 때는 이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한 다음 차츰 질서를 찾아간다. 자기에게도 반드시 빵이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먹는 것보다 빵에 일어나는 기적에 더 흥이 나게되면 먹는 것보다 나눠주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신앙이 성숙하면 자기만 먹으려고 아수라장이 되지 않는다. 질서가 생긴다. 그리고 내가 갖는 것보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데 더 큰 감격을 느끼게 된다. 

 

빵은 원래 크기보다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 가져왔던 그 빵보다 큰 빵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결코 우리가 드린 것을 과장해서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것 그것을 갖고 계속 역사하신다. 작은 것에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신다. 빵 하나를 엄청나게 크게 만드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빵이 늘어나는 하나님의 원리를 보여줄 수는 없다. 작은 빵일 때면 눈에 띄게 하나님의 역사가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빵이 커지면 사람이 들고 다닐 수가 없고 나눠주는 사람이 힘이 들 수 있다. 하나님은 나눠주는 사람에게 적당한 크기, 일을 해도 감당할 수 있는 크기 안에서 역사하신다.

 

결국 빵은 열 두 바구니가 남았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더 챙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다양해서 은혜를 체험하고도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욕심을 더 내는 사람도 있다. 혹시나 밤이 되면 먹을 게 없을까봐, 기적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까봐 빵을 챙긴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회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한 번 준 축복과 은사를 거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빵을 챙겼을 것이다. 그런 다음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다.

  

그 빵은 누가 가져갔을까? 아마도 소년이 가져갔을 것이다. 소년은 처음에 다섯 개의 빵을 내 놓았는데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 빵은 열두 바구니가 되어버렸다. 한끼 먹을 빵이 이제는 한 달은 족히 먹을 빵으로 부풀었다. 열두 바구니의 빵을 혼자서 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함께 온 가족과 친지에게 들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빵만이 아니라 바구니도 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씩 떼어주던 빵이 이제는 바구니까지 덤으로 왔다. 처음 빵을 내어 놓은 소년의 믿음을 예수님은 결코 헛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년에게 상급으로 그 열두바구니를 챙겨주셨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다른 소년도 빵이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소년은 빵을 내놓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 소년은 빵을 내놓지 않은 대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또 이 기적의 주인공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남아야 했다.

 

소년은 이 때 무엇을 배웠을까? 믿고 떼어주니 줄어든 것이 아니라 열두 바구니가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요 나눔의 원리다. 믿음은 기적을 낳고 나눔은 풍요를 낳는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다.

그 춥고 어두운 공간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이 기적을 체험한 그날 밤, 아무도 춥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훈훈한 밤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신앙은 나 하나의 권리포기로 기적이 일어나고 내가 축복받으며 내가 받은 축복으로 타인들도 함께 행복해지는 원리를 갖고 있다. 오병이어의 진정한 기적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