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묵상하는 하루

가난한 자들을 위해(열왕기상 17장 12절)

강 영 길 2011. 12. 5. 18:20

오늘날 대형 교회들이 참 많다.

70만이 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나 7만이 넘는 온누리 교회.

내가 대학생이던 80년대만 해도 천명을 넘으면 큰 교회라고 했는데

이제는 천명은 작은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국 교회는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한국 교회 전체 교인은 굉장한 속도로 줄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성장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대형교회가 성장한 셈이다.

교회가 대형화되는 것은 마치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같다.

 

예수님이 집회를 할 때 수천명이 모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대형 교회를 만들지 않으셨다.

예수님 시대에 수천명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어떻게 했을까?

오늘날 우리처럼 대형 스피커가 없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산상보훈을 전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백명이 넘는 사람에게 광야에서 말을 하긴 힘들었을 것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제자들에게 말을 했을 것이고 제자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즉 소문으로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다.

한 번에 수천명에게 말을 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오늘 우리는 마치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전한 것처럼 생각한다.

 

한국의 교회가 커진 것은 결코 예수님의 생각과 다를 지 모른다.

육성으로 조근조근 말해서 들릴 수 있는 정도의 소수 그룹, 그 수많은 소그룹들이 

물방울처럼 커져서 거대한 강물을 만드는 방법이 예수님의 방법이었다.

 

열왕기상 17장 12절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 구절을 묵상하다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샜다.

엘리야를 만난 여인은 밀가루 한 통과 기름 조금밖에 없어서 이제 굶어죽을 상황이다.

오늘날 인류의 60%가 단 한 켤레의 신발도 없이 산다고 한다.

신발을 챙기지 않는 나에게도 운동화 구두 슬리퍼 등, 따지다 보면 거의 열켤레의 신발이 있다.

그런데 전 인류의 60%가 신발 한 켤레도 없이 산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 2만 6천명이 굶주려 죽는다고 한다.

한국의 대형 교회가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가 한 교회씩이 굶주려 사망한다고 생각해 보자.

한국의 교회가 대형화 되는 게 결코 영광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대형화된 교회를 자랑할 게 아니라

그만한 사람들이 매일 굶어죽고 있는 것을 애통해야 한다.

권력을 추종하고 성과를 바라며 대형화되고 우상화된 교회의 모습에 취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생각하며 복음을 전했는지를 생각할 때다.

 

엘리야를 만난 여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나의 행동과 관심이 필요할 때다.

그들에게 무엇을 줄 것이냐 이전에 그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기도로부터 한 걸음씩 가난한 영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