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은 것은 최고의 존경의 표현이다.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과연 나는 예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을 수 있을까? 머리털은 가장 높은 것이고 발은 가장 낮은 것이다. 나의 가장 높은 것으로 예수님의 가장 낮은 것을 섬기는 마리아의 자세가 진정한 종의 자세다.)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맹인의 눈이 죄 때문이 아닐 수 있었던 것처럼 병도 꼭 죄 때문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인 경우도 있다.)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나사로와 그 자매들을 사랑한 예수님이 그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바로 고치러 가지 않았다. 예수님이 듣자마자 달려가야 할 것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지시는 데에 예수님의 때가 있다. 예수님이 당장 나를 고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그 때에 우리를 만지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내가 빛 가운데 있는지 어둠 가운데 있는지 내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실족할 수밖에 없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 하는데 그곳으로 가려는 이유는 나사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셨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죽음까지도 감수하며 섬기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있는 모든 곳은 예수님을 쳐죽이려 하는 곳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으로 오셔서 나를 살리셨다.)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이 이곳에서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 마치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렸던 것처럼 멀리서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더 사랑하므로 직접 찾아오시고 제자들에게 보여서 더 믿게 하려고도 직접 오신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행동으로 보이시고 증명하시기도 하신다.)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의심많다고 알려진 도마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국 이 말은 실현이 된다. 당장 죽지 않았으나 그들 모두 주님과 함께 죽는다.)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사람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으로 문안을 왔는데 예수님은 그 집으로 가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을 하면 사람들처럼 집으로 문안을 갔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지 않았으므로 무덤 앞에 머물렀다. 모든 사람들이 죽은 자라고 하며 나사로를 포기했으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추악한 자라고 해도 예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또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인 위안을 간 것이다. 살아있는 자를 위로하러 갔고 그것은 살아있는 자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다. 이른바 명예와 격식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죽은 나사로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 때 예수님만은 죽은 나사로를 찾아간다. 모두가 잊어버린 시체를 찾아간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습과 체면보다 죽은 자인 나사로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찾아가 아무도 없는 무덤 앞에 있는 것이다.)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의 성품이 마리아보다 활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오신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예수님께 온 것이다. 이래서 부지런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마르다에 비유된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안 계셨던 데 대한 원망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추호의 의심없는 믿음이 동시에 드러난다. 그녀는 예수님만 계셨다면 동생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연 누가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르다의 믿음은 그처럼 확실했다. 그런 확실한 믿음이 오히려 사람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사람들이 낙심할 때에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마르다의 발언은 그런 상황을 예상할 수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런 정도의 믿음보다 훨씬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미 죽어버린 인간이지만 그 인간을 하나님이 살리고자 하면 꼭 일어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완전히 죽어서 썩은 인간일지라도 예수님이 구하시면 반드시 이뤄진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부활이 마지막 때에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마지막에 구원받도록 기도해달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부활이라도 감사히 받겠다는 태도가 보인다. 마르다는 비록 동생은 이제 육신으로 죽었으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여전했다.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다. 비록 내 기도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았으나 그래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며 마지막의 은혜를 끼칠 줄 알고 감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마르다의 이런 믿음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 기도보다 더 많은 것을 들어주신다. 마르다는 마지막 때에 부활하길 원했으나 예수님은 곧 현실에서 나사로를 살려주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은 그의 소원보다 더 큰 것을 계획하신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예수님을 믿으면 설령 육신이 죽는다 해도 살아날 수 있다. 내가 죽은 것과 같은 존재일지라도 예수님은 나를 살리실 분이다.)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이미 마르다의 마음을 알고 계셨다. 그들과 이미 상당한 관계를 맺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에게 확인 질문을 한다. 우리가 마음으로 고백하고 입으로 선포하는 것이 중요함을 예수님은 깨우치고 있다.)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신앙 고백은 완벽한 신앙 고백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확한 정체를 가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가 믿는 것은 돈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우상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세상에 오신 분으로 그리스도인 그 분을 믿는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이처럼 정확한 정체성을 밝혀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을 마음으로부터 한 번도 고백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확히 알고 그 분을 온전히 믿은 증거를 마르다가 보여주고 있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사람들은 믿는 자의 동향을 인간적으로 해석한다. 슬픔은 어디에서나 표할 수 있다. 그러나 곡하는 것은 형식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형식적인 것을 표현하러 무덤에 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해야할 의무같은 것을 하러 간 줄 알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른 행동을 한 것이다. 세상은 죽은 자 앞에서 슬픔을 표하려 하지만 믿는 자는 그 문제를 예수님 앞으로 갖고 나가야 한다. 당대 문화에서 사람이 죽으면 수일 안에 외부에 출입하여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금지되어있었을 것이다. 집에 있거나 무덤에 가서 곡하는 것만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습을 깨고 마리아는 예수님께로 나왔다. 우리의 문제를 죽은 자의 무덤 앞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해결하려 해야 한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는 마치 마르다가 했던 말을 외워서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함께 훌륭한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인간을 보는 마음, 또 슬픔에 잠긴 자의 마음을 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여기에 있다. 비통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신다.)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신약의 가장 짧은 구절이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에 이미 슬퍼하셨다. 물론 살리실 줄 아셨으나 슬퍼하셨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은 아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신 것은 그 무덤을 보고 우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최악의 상태를 보고 가장 가까이 와서 우신다. 멀리서 우시는 게 아니다. 어차피 살리실 거면 웃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들을 위로하진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살려주는 기적을 일으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려운 존재, 우월한 존재로 봤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함께 울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시는 존재가 되신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함께 우셔서 인간을 위로했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예수님 방법의 소통이다.)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게 된 이가 바로 나같은 인간이다. 죄로 인해 썩을 대로 썩은 자인 나의 모습이 죽어서 돌무덤에 갇힌 나사로인 것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은 항상 내 말을 들으신다. 쉬지 않고 들으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종의 쇼를 한다. 즉 보여주고 증명하기를 시도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일종의 쇼맨십도 할 수 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기적 위에 기적이 있다. 지금 나사로는 염을 한 상태로 나왔다. 무덤에서 스스로 나왔는데 온몸이 묶인 채로 나왔다. 수족을 베로 묵였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였다. 방향도 알 수 없다. 분별력도 없이 나온 것이다. 그는 오직 예수님의 목소리에 의지하여 나왔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을 때가 이러하다. 전혀 상처를 씻지도 않았고 죽은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다. 어떻게 나왔을까? 그냥 기적적으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를 때 나를 회복시켜서 부르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죽은 상태 그대로 우리를 부르신다. 먼저 깨끗하게 하시는 게 아니다. 먼저 살리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다. 그 다음에 썩은 곳을 씻어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풀어서 다니게 하라고 했다. 아직 썩은 냄새가 나는 우리를 예수님이 풀어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손으로 풀어준다.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누구나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을 서로 풀어주는 것이 믿는 자의 할 일이다. 풀어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걷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가 걸어서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걸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것은 최고의 긍휼의 표현이요 예수님이 죄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그런데 바로 이 나사로 사건이 예수님을 죽도록 촉발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예수님이 인간을 최고로 사랑하는 그 순간 인간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최악의 모의를 한 것이다. 이 점이 예수님과 인간의 대척점이교 교차점이다. 복음을 듣고 믿는 자가 있으며 이처럼 방해하는 자가 있다. 이런 방해에 굴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이들은 그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기득권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있다. 욕망이 그들에게 옳은 판단을 방해한다. 그 욕망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있다. 인간의 두려움은 인간을 죄악으로 몰아넣는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진원지가 인간의 두려움이다.)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여서 세상에 문제가 없도록 하자는 선동을 하고 있다.)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가야바의 간교한 통찰을 들은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본격적으로 모의한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예수님이 모두를 위해 죽으려 한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 오히려 죽이려 하고 있다. 예수님을 죽여서 모두를 살리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 한 것이고 인간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빼앗길까봐 두려워서 한 것이다. 같은 행위라도 의도에 따라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다.)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악한 세력은 전력을 다해 복음을 방해하려 한다. 또 어디든 기회만 되면 방해하기 위해 전략을 짠다. 악한 세력의 이러한 끈질김에 비하면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오히려 부족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