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묵상하는 하루

온유한 자 되기(갈라디아서 5:22-23)

강 영 길 2011. 12. 18. 20:57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은 잘 알려진대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제시하고 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자비양선충성

23 온유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고 하면서

정작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경우를 쉽게 발견한다.

누군가를 정죄하려는 뜻은 아니다.

내 자신도 그런 지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성경에 나온 단어 중 아주 매력적이고 달콤한 단어들이 참 많다.

나는 이들 아홉가지 열매중 한 단어만 선택해서 내 생활에 적용하라고 하면

온유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어쩌면 대부분의 신앙인은 온유한 사람이 되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 아닐까 한다.

이런 사실을 역설적으로 접근해 보면 온유한 사람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도 되겠다.

 

온유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보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며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 사람에게 부드럽게 대한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온유한 존재로 찬양한 경우는 무척 많으나

사람에게는 온유하다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사람을 향해 온유라는 말을 쓴 경우는 딱 두 번이라고 한다.

횟수보다는 온유하다고 평가받은 대상이 딱 두 명이다.

한 명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이다.

다른 한 명은 아쉽게도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온유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나에게 왜 아쉬운가?

예수님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단지 인간으로서 온유하다는 말을 들은 자는 오직 모세 한 명 밖에 없다.

아, 이건 거의 절망적인 것 아닌가 싶다. 

 

나같은 인간은 온유의 근처에도 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맺을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그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절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나를 통해 맺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열매가 맺히는 것이지

내 노력으로 되는 바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은 다행이다.

 

성령의 열매를 내가 지속적으로 맺을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아니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게 아니므로

나는 그저 성령님이 나에게 부단히 역사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점처럼 작은 자가 될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

그러나 내가 자꾸 커지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할 수가 없다." 라고.

 

그렇게 보면 내가 커지려고 하기 때문에 결코 온유한 자가 못 된다는 말인가 보다.

주님, 나로하여금 온유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소서.

내가 당신 앞에 더 없이 작은 자가 되겠나이다,라고 쉼없이 고백할 때만이

나에게도 성령의 열매가 맺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