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음서/마가복음

마가복음 6장

강 영 길 2014. 10. 1. 19:42

6장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람들은 위대한 자가 가까이 있을 때 그 진가를 모른다. 거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는 선입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예수님조차도 고향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선입관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입관은 그만큼 사역을 어렵게 만든다. 선입관을 버리고 순전하게 그 사실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신은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예수님이 권능을 발휘하지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님과 친밀하다고 생각한 순간 예수님을 경외하기보다 지나치게 가깝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자기 자신이 친밀함을 과시하여 교만해지기도 한다. 예수님과 친밀해질수록 더욱 예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이 권능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폭군이 아니다. 안 되는 것을 강권적으로 바꾸시지 않는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오히려 이상히 여길 만큼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권위가 서지 않았다. 선입관이 들어서면 이처럼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권능이 발휘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다 잘못된 게 아니다. 권능이 발휘되지 않을 때는 그 영역에서만 노력을 하는 것도 지혜다.)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왜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이 권능을 직접 행하지 않았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언젠가 예수님이 떠나면 예수님이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제자들이 그 일을 대신해야 할 때가 온다. 예수님은 그 때를 대비해 예행 연습을 시킨 것이다. 이렇게 연습을 해야 예수님이 떠난 뒤에도 이들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훈련을 시키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예수님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주 계획적이고 철저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라는 말일 것이다. 마치 만나와 메추라기로 광야에서 먹였듯이 아무것도 갖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으라는 말과 같다.)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아무것도 갖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음을 증거한 것이다. 또 어딜 가나 축복의 말을 했지만 그들에게는 축복의 말조차 줄 것이 없음을 나타내라고 한 것이다. 복음을 전혀 듣지도 않거든 굳이 그들에게 축복을 할 것조차 없다는 뜻이다.)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여기가 제자들의 단독 첫 사역지다. 그곳이 예수님의 고향이다. 예수님은 그 고향에서부터 제자들에게 기름을 붓고 홀로 떠나는 연습을 하게 하셨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그곳에서 태어난 것처럼 그곳을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첫 출발지로 삼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되는 그 지점에서 내 첫발을 내디뎌야 한다. 이 말씀을 나 아닌 타인에게 적용할 게 아니라 믿는 자 자신을 더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하면서 정작 복음을 진정성 있게 듣지 않는 자신과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는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된 계기가 제자들의 활동이었다. 그것도 예수님 고향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이름이 드러난 것이다. 지금까지 이름을 숨기려 했던 예수님이 그가 환영받지 못한 고향에서 오히려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은 환영받는 곳에서는 굳이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고 환영받지 못한 곳에서 드디어 사회적으로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것도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하면서 이름을 드러냈다. 이것은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이제 이들에게 나의 사역을 넘기고 나는 떠나갈 준비를 한다는 일종의 선포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긴 뒤 십자가에 올라갈 각오를 하신 것이다.)

15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진정한 사자들은 결코 권력에 순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을 향해 올바른 말을 했다. 그러다가 순교를 당했다. 순교는 순응적인 인물에게 결코 오지 않는다. 대세를 거스르는 사람에게만 순교는 온다. 시대를 거스르는 바른 말을 하는 자에게만 순교의 영광은 주어진다.)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헤롯은 요한의 말을 달갑게 들었고 보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세를 했다. 이래서 맹세는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인간은 늘 입을 조심해야 한다. 입술의 말로 인해 자신의 영원한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맹세의 뿌리는 부도덕이다.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부도덕이 최후에 자신의 영생 문제로 귀결된다. 인간의 부도덕은 인간의 종국을 망치게 한다.)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헤롯은 아직 분별력이 없는 아이에게 맹세를 했기에 문제를 일으킨다. 맹세를 할 때에도 스스로 분별할 줄 아는 자와 맹세를 해야 한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지혜를 가진 자와 하는 맹세가 가치있는 맹세다.)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잘못된 맹세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이 죄를 인식하고 근심을 하면서도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과 같다. 죄와 결합하기로 맹세하면 안 된다.)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소녀가 죽은 남자의 머리를 쟁반에 올려서 가져갈 정도였다면 이 소녀의 배짱도 만만찮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순전히 가정 교육 탓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악함을 물려받은 것이다. 모든 악한 것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 출발한다.)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17절부터 29절까지는 과거 회상이다. 과거의 역사를 뒤집어서 설명하고 있다.)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쉴 시간을 준다. 예수님은 막무가내로 일을 시키지 않는다.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숨쉴 시간을 준다.)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제자들이 사방으로 다니면서 병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제 제자들은 쉴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빈 들이요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이들이 무리를 지어 앉았으므로 빵을 떼어 주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무리를 짓지 않으면 빵을 나눠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빵을 나눠줄 적절한 형식을 제시했다. 예수님은 어떤 일도 막무가내로 하지 않았다. 항상 체계를 갖추고 계셨다.

들판에서 해가 지면 어둠이 급속도로 찾아온다. 불과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두워져 버린다. 하늘에 달이 있다는 이야기도 없고 이어지는 물 위를 걷는 사건에서도 달이 떴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어두운 밤이었음에 틀림없다. 날은 어둡고 먹을 것은 없으니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모습이다. 이 구원 받기 전의 불쌍한 사람들이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이 오병이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5천명을 먹인 사건이다.

가족을 포함하면 적어도 3만명은 되지 않았을까? 어디에든 종교적인 모임에는 여성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음에 틀림없다. 당시로선 다산 풍속이 있었으니 엄마들은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아이를 데리고 나왔으리라 추측이 된다. 그러면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하면 최소한 2만명, 많게는 4만명의 인구까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중간인 3만명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선 예수님은 축복만 했다.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빵을 더 만들어달라는 말도 않았고 오천명을 먹게 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축복하고 떼어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축복의 힘이다. 축복은 능력이요 축복은 기적을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의 말을 반복적으로 할 이유가 있다.

예수님이 축복하기 전에 먹을 것을 찾으니 아이가 들고온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 아이가 들고온 음식이라면 결코 큰 빵이나 물고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빵은 아이의 한 끼 음식 정도에 해당하는 작은 빵 다섯 개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 어촌에도 있는 것처럼 말린 물고기를 쪄서 가져왔을 것 같다. 젖은 물고기를 들고오긴 어려웠을 테니까.

기적은 놀랍게도 아이가 자기 먹을 것을 예수님께 드린 데서 시작된다.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자기 먹을 것을 내 놓지 않겠노라고 떼를 쓰고 응석을 부리지 않았을까? 심지어는 제자들이 가져가기 전에 얼른 먹어버렸을 수도 있다. 만일 아이가 먹어버렸다면 그 빵은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냥 한 사람이 먹을 빵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이 그렇다. 혼자 먹으면 혼자 배부르고 끝나되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한데 그 어린 아이가 그 먹을 것을 내 놓았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내 놓았을 것이다. 아이는 기적을 바라고 내놓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리라고 내놓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내 놓자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데서 출발한다. 내가 먹을 권리를 포기할 때 하나님의 기적은 시작된다. 기적을 바랐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때 기적은 시작된다.

예수님이 축복을 하고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서 주셨다. 다섯개의 빵을 왜 쪼개서 주었을까? 제자는 열둘이고 빵을 받을 사람은 삼만명이다. 일일이 나눠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손도 부족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배를 해 준다. 그런데 제자들 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분명히 예수님이 빵을 나눠주셨는데 똑 같은 빵이 열개로 늘어난 것이다. 제자들은 눈위 휘둥그레졌다.

그 다음 제자들은 빵을 떼서 나눠주기 시작한다. 원래도 작은 빵이었는데 그 빵을 제자들이 큼직하게 잘라서 나눠줬을리는 없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눠줬을 것이다. 이것으로 도저히 3만명을 먹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의심을 하면서, 예수님은 왜 이런 허무맹랑한 짓을 시킬까 고민하면서 나눠줬을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나눠줬다. 그런데 웬일인가? 빵이 작아지질 않는다. 다섯 번 여섯 번 반복해서 빵을 나눠주면서 관찰하던 제자들에게 자신감이 생기고 믿음이 생긴다. 그래서 제자들은 빵을 점점 크게 떼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인간의 믿음의 성장을 상징한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시작한 어떤 일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점점 큰 믿음을 갖고 과감한 실천을 하기 시작한다.

제자들도 이제는 부족할 것인가를 더이상 걱정하지 않으면서 빵을 떼기 시작한다.

그러나 열 두 명이 3만명에게 빵을 나눠주기에는 시간도 일손도 부족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일꾼은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듯이 빵을 나눠주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이 빵이 줄지 않는 역사를 경험했듯이 빵을 하나 받은 엄마가 아이에게 빵을 나눠주었는데 자기 빵이 줄지 않는 것을 경험했을 테고 아이가 아버지에게 빵을 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빵이 줄지 않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놀람과 찬양과 기도가 저절로 나왔을 것이다. 놀라서 소리를 지른 사람, 감격해서 우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감격에 겨워 그 빵만 바라보고 눈물짓고 있었을 것이며 그 빵을 본 순간 병이 나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70인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밥상을 받았던 그 감격이 회중들 가운데 일어났을 것이다.

자기 빵을 나눠줘도 줄어들지 않자 그 경험이 너무나 신기해서 빵을 나눠누고 나눠준다. 여기 저기서 빵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만일 받은 사람이 먹어버리면 먹은 순간 그 빵은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빵을 나눠주는 사람은 계속적인 기적을 체험한다. 이것도 하나님 나라의 논리다. 빵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축복의 기도를 했을 것이다. 나눠주는 사람에게 축복하고 빵에게 축복하고.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빵을 떼어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처음에 빵을 조금 받았던 사람들은 그 빵을 먹어버렸겠지만 이웃들의 빵이 줄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자기들도 다시 달라고 하여 그 빵을 남에게 나눠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빵이 다시 기적을 일으킨다. 이것은 신앙의 파급효과다. 처음에는 자기 배만 채우던 사람들이 주변에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하면서 다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무 둥치같다. 빵을 나눠주는 과정이 처음에는 하나의 빵을 쪼개면 두개가 되고 두개가 네개가 되는것이 마치 나무 기둥에서 두 가지로 뻗고 다시 두 가지가 되고 다시 두 가지로 뻗어나는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의 원리같다. 하나의 소문이 두개의 소문이 되고 두개의 소문이 네개의 소문이 되고 네개의 소문이 여덟개, 여덟개가 열여섯 개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같다. 예수님은 벌써 소셜 네트워크의 힘을 알았던 것일까?

처음에 빵을 나눠줄 때는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서로 빵을 받고 싶어했을 것이다. 은혜가 적을 때는 이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한 다음 차츰 질서를 찾아간다. 자기에게도 반드시 빵이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먹는 것보다 빵에 일어나는 기적에 더 흥이 나게되면 먹는 것보다 나눠주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신앙이 성숙하면 자기만 먹으려고 아수라장이 되지 않는다. 질서가 생긴다. 그리고 내가 갖는 것보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데 더 큰 감격을 느끼게 된다.

빵은 원래 크기보다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 가져왔던 그 빵보다 큰 빵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결코 우리가 드린 것을 과장해서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것 그것을 갖고 계속 역사하신다. 작은 것에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신다. 빵 하나를 엄청나게 크게 만드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빵이 늘어나는 하나님의 원리를 보여줄 수는 없다. 작은 빵일 때면 눈에 띄게 하나님의 역사가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빵이 커지면 사람이 들고 다닐 수가 없고 나눠주는 사람이 힘이 들 수 있다. 하나님은 나눠주는 사람에게 적당한 크기, 일을 해도 감당할 수 있는 크기 안에서 역사하신다.

결국 빵은 열 두 바구니가 남았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더 챙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다양해서 은혜를 체험하고도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욕심을 더 내는 사람도 있다. 혹시나 밤이 되면 먹을 게 없을까봐, 기적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까봐 빵을 챙긴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회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한 번 준 축복과 은사를 거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빵을 챙겼을 것이다. 그런 다음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다.

그 빵은 누가 가져갔을까? 아마도 소년이 가져갔을 것이다. 소년은 처음에 다섯 개의 빵을 내 놓았는데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 빵은 열두 바구니가 되어버렸다. 한끼 먹을 빵이 이제는 한 달은 족히 먹을 빵으로 부풀었다. 열두 바구니의 빵을 혼자서 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함께 온 가족과 친지에게 들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빵만이 아니라 바구니도 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씩 떼어주던 빵이 이제는 바구니까지 덤으로 왔다. 처음 빵을 내어 놓은 소년의 믿음을 예수님은 결코 헛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년에게 상급으로 그 열두바구니를 챙겨주셨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다른 소년도 빵이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소년은 빵을 내놓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 소년은 빵을 내놓지 않은 대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또 이 기적의 주인공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남아야 했다.

소년은 이 때 무엇을 배웠을까? 믿고 떼어주니 줄어든 것이 아니라 열두 바구니가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요 나눔의 원리다. 믿음은 기적을 낳고 나눔은 풍요를 낳는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다.

그 춥고 어두운 공간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이 기적을 체험한 그날 밤, 아무도 춥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훈훈한 밤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신앙은 나 하나의 권리포기로 기적이 일어나고 내가 축복받으며 내가 받은 축복으로 타인들도 함께 행복해지는 원리를 갖고 있다. 오병이어의 진정한 기적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이 홀로 남아 뒤처리를 하고 있다. 예수님은 늘 명예로운 일을 한 게 아니다. 이미 밤이 늦었다. 그런데 제자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남아서 무리를 보내고 있다. 말하자면 홀로 뒤처리와 청소까지 하고 떠나신다. 예수님은 결코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을 쉬라고 보냈다. 그런데 제자들이 쉬긴커녕 거친 항해를 하고 있자 예수님이 오신다. 아마도 휴식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사경이면 새벽 1-3시이다. 밤이 깊어서 보이지도 않는 상황인데 산에 있던 예수님이 어떻게 아셨을까? 예수님은 늘 우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가 휴식하는 동안에조차 관심을 주신다. 또,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때가 곧 예수님의 더 깊은 관심을 받을 때며 예수님과 더 친밀해질 기회임을 알아야 한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다가올 때 우리는 오히려 그 접근에 놀라곤 한다. 특히 죄성이 있으면 말씀과 권능이 다가오면 오히려 거부하고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것과 같다. 바다 위로 걸어오는 기적을 보고선 오히려 겁을 먹는 게 인간의 모습이다.)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직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부활의 순간에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오히려 예수님이 떠나셨을 때, 예수님의 부재의 순간에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잘 몰랐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때에 모두들 도망을 가 버렸다. 그러나 제자들이 도망친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오히려 찾아갔다. 그분이 누구인지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어떻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확히 모르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다. 그것이 믿음의 여정이다.)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병든 자도 병든 자이나 그 병든 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 대단하다. 설령 믿음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 열정은 가치가 있다.)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예수님을 구경한 자가 치유받은 게 아니다. 옷자락이라도 만난 자 곧 직접 만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었다. 먼 발치에서 봐도 예수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직접 만나야 한다. 가령 맹인은 예수님 얼굴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얼굴을 몰라도 직접 옷자락을 만지면 낫는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었다. 누구나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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