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음서/마가복음

마가복음 10장

강 영 길 2014. 10. 5. 23:56

10장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이 참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다. 사실 동일한 바리새인이 따라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부지런함이나 열정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가는 동네 가는 곳마다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거의 비슷한 의도로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사고 체계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예수님은 바래새인들을 비판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사랑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율법을 중시하고 포용이 아니라 징벌을, 관용이 아니라 정죄를 강조한다. 그래서 누구를 살릴까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누구를 죽일까에 관심을 가졌다. 그 모습이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모세 시대에 결혼 상황과 예수님 시대는 달랐고 오늘도 또 다른 상황이다. 모세 때 여자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따라서 결혼은 하였으나 아예 돌보지도 않을 거면 이혼증서를 써서 인간답게 살게 하라는 게 하나님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모든 이혼이 정당한 것처럼 말한 바리새인을 질책한 말이다. 이 구절을 들어 예수님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말을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옳은 말은 아니다. 예수님은 혼자 사는 것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간답게 살고 평강 속에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결혼을 하건 독신으로 살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시작했다면 이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씀이다.)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어린아이의 같은 모습을 원하신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특히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일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천국을 가르치면 아이는 의심없이 그대로 믿는다. 이는 곧 의심 없는 믿음을 강조한 말이다.)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율법적인 생활을 한 것은 신앙생활의 기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결코 끝이 아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두 가지 요구를 하셨다. 하나는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것은 이 사람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한 것도 아니다. 왜냐면 부자인 제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율법은 지켰으되 사랑을 베풀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마음은 긍휼한 마음이다. 율법보다 사랑이 우선이었다. 또한 이 청년은 물질이 우상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둘째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제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이미 제자는 다 뽑으셨고 제자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물리치셨다. 물질을 섬기지 말고 나를 섬기라는 말이다. 물질이 우상이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금해야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가진 것을 다 팔라고 한 이유는 우상이 될 것이라면 하나도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두 가지 요구는 사실상 한 가지 요구인 셈이다.)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사람은 예수님의 두 가지 요구를 다 듣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한 가지 요구다.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고 돌아가버렸다. 그가 누렸던 과거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이처럼 진리를 들었으나 그것을 가슴으로 새기지 못한 사람이 많다. 뼈저리게 듣기는 했으나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부자도 구원을 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의 원칙이 있다. 돈을 많이 가진 것이 죄가 아니라 그 중심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일 것이다.)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믿음은 그 단계나 세월보다 그 중심이 중요하다. 믿음에서만은 아무도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 언제 주인이 종의 계급장을 바꿔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갑자기 제자들이 놀라고 무리들은 두려워했다. 그 이유로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예수님이 앞서 갔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선두로 나가니 그 용기와 기상에 모두가 놀라워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무리를 이끌고 선두에 나섰다는 표현은 없었다. 그런데 죽음으로 가는 길에 드디어 예수님은 선두로 나섰다. 사람들은 그 비장함에 놀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비겁하지 않았으며 비겁을 가장한 용기를 보이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자기 길을 걸었을 뿐이다. 이처럼 당당하게 자기 길을 걸을 때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당당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우습게 볼 수가 없다.)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미 예수님은 죽음을 예고했고 다시 반복적으로 현실화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죽음을 예고한 분이 죽음의 도시를 향해 가고 있으니 모두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정권이라도 잡을 줄 착가한 것이다. 그래서 벼슬 한 자리라도 주길 원했던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말한 것, 아직도 천국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사실 모든 사건을 성경을 통해 아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들이 한 눈에 보이나 제자들에게는 미래의 일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받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순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나 결국 그런 결과가 되었다.)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 자리를 예수님이 줄 권한이 없다고 한다. 예수님조차도 그것을 줄 수 없고 단지 하나님만이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언가를 탐내도 얻을 수 없음을 뜻한다.)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제자들이 서로 쟁투하는 장면은 보기 드문데 이겨서는 화를 내고 있다. 그만큼 이들에게도 경쟁심이 있었다. 하물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오죽할까? 인간이 공명심을 갖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포용하신다. 그러나 그런 공명심대로 해결해주시진 않는다.)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은 남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주인이다. 종이 된다는 것은 모든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에 이를 수 없다.)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이 드디어 드러났다. 예수님은 결국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 목숨을 버린다.)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바디매오, 디매오는 존경의 의미이고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존경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름과 그의 실재가 다른 점이 해학적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결국 그 이름의 의미가 실현된다. 예수님은 늘 우리의 정체성을 그렇게 실현시켜 주신다.)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가 간절히 예수님을 부르짖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귀찮아 하고 시끄럽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동체가 어려워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베푸신다. 물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인지 자기 욕심을 추구하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인간은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두고 그 형제를 정죄하지 말고 자기 길을 가야 한다.)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죄인인 모든 사람이 곧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하지 않고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바디매오가 맹인이었으나 달려갈 수 있는 이유는 마음으로 정열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는 걸 보지 않으니 오히려 믿음이 클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히려 믿음을 방해한다. 성령 인도도 안 보일 때 오히려 정열이 있고 의심이 없다. 눈에 다른 것이 보이면 예수님의 음성만 듣고 쫓아갈 수 없다. 그리고 눈을 뜬 후 예수님은 그에게 가라고 했으나 그는 예수님을 따라 갔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세상의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은 것이다. 눈을 감으나 뜨나 오직 예수님만을 중심에 두었기에 그는 존경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실현한 것이다. 악에 중독되면 세상이 어떤 악을 저질러도 그 악에 동조하면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한다. 내 자신의 죄악에도 거듭 동조하며 산다. 그것이 눈 먼 것이다. 거짓과 악에 중독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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