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나눔/축복하는 자녀교육

축복하는 자녀교육 6

강 영 길 2012. 2. 16. 23:41

8)듣는 귀가 필요하다

귀높이를 맞추려면 듣는 귀가 필요하다. 우리의 귀를 열지 않으면 아이들과 귀높이를 맞출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기도를 들으시며 하나님의 귀를 우리에게 맞추신다.

하나님이 볼 때 우리는 어린 아이같다. 우리는 늘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른다. 주신 말씀 안 지킨다. 끊임없이 엎어지고 자빠진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아예 잊어버린다.

우리의 실수만이 아니라 알고도 지은 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것도 우리 입장이 되어 들으신다. 이것이 바로 부모와 교사의 자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을 대할 때 듣지는 않고 마치 우리가 하나님인 것처럼 대한다. 흔한 농담으로 내가 하나님 병에 걸린다. 마치 내가 하나님인 듯이 행동하고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말한다.

마태복음 18:22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497번을 용서하라고 하셨다. 아, 497번의 죄라고? 그럼 나는 끝났다. 살아오면서 저지른 내 죄는 너무 많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같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비유다. 이것은 무한정 용서하겠다는 뜻일 뿐이다.

어떤 이는 497번의 용서가 한 가지 죄에 대한 용서라고 한다. 심지어 해가 저물기 전에 497번 용서한다는 것이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같은 죄를 이렇게 지을 줄 이미 알고 계실 테니까. 하지만 성경에는 이런 말이 명증하게 실리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태복음 18:35에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아이들도 하나님 안에서 형제다. 우리가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이처럼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이 교육이다.

용서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듣는 귀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귀 높이가 되어 들어야 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의 심정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들어야 한다.

 

9)부모들이 왜 듣지 않는가?

부모가 아이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들을 수 있다. 첫째,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겐 귀가 없다.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아 정체감이 낮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는 항상 무시한다. 남의 이야기를 무시하면 자기가 더 높아진다고 여기는 것이다.

둘째, 거만한 사람에게도 귀가 없다. 열등감과 거만함은 쌍둥이다. 거만을 다른 말로 하면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의견만을 주장한다. 그들은 남보다 먼저 말하고 말하기 전에 먼저 화를 낸다. 타인의 모든 의견은 반대요 공격이다. 어떤 객관적인 의견도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면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항상 ‘일단 반대’를 하고 본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높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무언가 항상 정당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럴듯한 이론과 권위자의 말로 포장을 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관계없는 권위자의 이름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셋째, 결정적인 이유다. 듣지 않는 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일까?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 같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실 리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끝도 없이 듣는다.

그러면 듣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잘 듣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나 교사를 아주 쉽게 분별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인지 아닌지.

내가 교사일 때 한 학생이 있었고, 그 아이는 매일 나를 찾아와서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끝도 없이 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그 아이를 피해 도망갔다. 그러다가 스승의 날 아이가 나에게 편지를 했다.

“선생님 저는 가끔 선생님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 편지를 보며 내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후 다시는 그 아이를 피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이들 눈동자를 통해 나를 바라보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누가복음 24:5절에서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 두 천사를 만난다. 그때 천사들이 말하길 “살아 계신 분을 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고 했다.

우리는 머리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20초 동안 가슴을 대고 안으면 박동수가 같아진다고 한다.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을 안아보자. 당신은 예수님의 심장이 느껴지는가? 지금 내 심장이 사람을 안았을 때처럼 뛰는가?

예수님은 아이들의 눈 속에, 아이들의 심장 속에 살아서 여러분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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