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나눔/축복하는 자녀교육

축복하는 자녀교육 8

강 영 길 2012. 8. 21. 08:29

제 2부 :축복의 시간

 

I.부모의 유산

 

1.자녀에게 축복을 내려라.

 

1)자녀를 축복하는 교육이 자녀를 바꾼다.

유태인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가족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한다. 그때 부모는 자녀에게 축복의 말을 한다. 그렇게 매주 하는 축복이 쌓이고 쌓여서 그들의 삶이 된다. 매주 축복의 말을 듣는 아이와 매주 꾸지람을 듣는 아이의 인생이 어떤 차이가 날지 능히 상상이 가능하다.

성경에는 부모로부터 축복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의 삶의 결과가 잘 나와 있다.

야곱은 축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속인다. 결과적으로 야곱은 축복을 받는다. 오죽하면 야곱의 축복이라는 찬양까지 있겠는가? 물론 총리가 된 요셉을 찾아 이집트에 간 뒤에 야곱은 바로왕에게 자신의 인생이 참 힘들었다고 한다. 야곱의 인생이 파란만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축복보다 고난을 먼저 기억하는 존재다. 그런면에서 인간은 나약하다. 하지만 부모로서는 축복하는 교육을 하는 것이 좋다.

 

2)아이들에게 말조심하자.

야고보서 3:9-11을 보자.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혀로 주와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그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한다. 찬양과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오니 형제들이여 그래서는 안 된다. 샘이 어떻게 한 구멍에서 단물과 짠물을 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저주하면 축복을 내릴 수 없다. 동시에 아이들에게 축복한다고 하면서 저주를 내릴 수도 없다. 저주와 축복은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물은 서로 뒤섞인다. 쓴맛과 단맛이 섞이면 아무 맛도 아니게 된다.

성경에 자녀를 꾸짖으라 채찍질하라는 말은 있으나 이를 통해 저주하라는 말은 없다. 꾸짖고 채찍질하되 저주해서는 안 된다.

 

3)아이들은 축복의 통로

누구나 잘 알듯이 우리는 축복의 통로다. 아이들도 축복의 통로다.

축복에는 일반적 축복이 있고 계시적 축복이 있다. 일반적 축복은 누구나 받는 축복이고 계시적 축복은 그리스도인만 받는 축복이다.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인가 반항하는 자녀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자녀를 사랑한다. 믿는 자건 믿지 않는 자건 사랑한다. 만일 하나님이 모두를 사랑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를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할 이유가 없다. 그 모두를 사랑하므로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따라서 믿지 않는 자도 부자로 살 수 있고 악행하는 자도 가끔은 일이 잘 풀릴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적 축복은 모두가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믿는 자만 받는 축복이다. 계시적 축복을 받으면 결론적으로 천국에 간다. 천국에 가는 것이 궁극적인 길이다. 그러나 이 축복에는 양면성이 있다. 계시적 축복을 받을 사람은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할 때 계시적 축복이 약속된다.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마음에 천국의 평안을 느끼는 사람이 계시적 축복을 받은 자다. 구원의 역사에 들어가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그것은 현세에서의 삶이 부유하거나 건강한 것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 마음에 최고의 평강이 있고 기쁨이 있을 때 축복이 된다. 하나님을 믿은 가장 큰 증거는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서 멈추는 축복은 축복이 아니다. 흘러갈 때 축복이다. 길이 없는 들판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 길이 넓어지고 자동차도 다니면 찻길이 생긴다. 많이 다닐수록 길은 넓어진다. 하지만 고속도로조차도 불과 십년만 통행이 없으면 길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축복하면 길은 넓혀지나 축복하지 않으면 길은 사라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로가 되기를 원하신다.

매주 축복을 받은 유대인과 매번 지적만 받은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 자존감의 문제다. 왕따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 버릇이 나빠질까봐 꾸짖을 필요도 없다. 오직 자녀를 축복하고 자존감을 높여줘야 한다. 사실 왕따로 말하자면 예수님도 왕따였다.

 

4)행동과 정체성을 동시에 꾸짖지 마라.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행동은 꾸짖어야 한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였는데 그 잘못을 알고도 다윗이 사건 처리를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압살롬이 결국 반역을 하게 된다. 자식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처리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데 반항적인 아이들의 경우 꾸짖다 보면 결국 부모와 싸움이 되기 쉽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반항적인 아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명확히 지켜야 한다.

가령 공부와 게임을 두고 아이와 논쟁이 벌어질 경우를 생각해 보자. 부모가 나서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먼저 공부와 게임의 시간을 정하라고 한다. 아이가 게임 한 시간을 하고 공부 두 시간을 한다고 결정을 한다. 부모는 아이와 합의를 한다. 그런 다음 게임을 다 하면 아이가 시간을 늘려달라고 떼를 쓴다고 치자. 이럴 때 부모는 아무리 떼를 써도 들어주면 안 된다. 본인이 한 약속을 지키도록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지면 다시는 아이의 습관을 잡을 수 없다.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아이가 바뀌게 된다.

아이와 언쟁할 때 가장 주의할 점은 정체성을 저주하지 말라는 점이다. 사무엘상 20장 30-31절 사울은 다윗을 숨겨준 자신의 자식인 요나단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사울은 자기 아들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고 저주를 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저주는 그대로 아들에게 간다. 결국 요나단은 왕이 되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는다. 인간들은 자신의 열등감이나 분노에 못 이겨 자식을 저주하곤 한다.

“너는 그렇게 하면 인생 밑바닥을 살게 돼.”

“게임만 하면 나중에 마약 중독자나 된다.”

“너 인간쓰레기 되기 쉬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정체성을 꾸짖어서는 안 된다. 잘못한 점만 지적해야 한다. 만일 아이를 저주하면 그 저주는 반드시 실현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녀의 정체성을 저주하면 안 된다.

'주제별 나눔 > 축복하는 자녀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교육의 왕도는 무엇일까?  (0) 2013.03.08
축복하는 자녀 교육 9  (0) 2012.08.27
축복하는 자녀교육 7  (0) 2012.02.21
축복하는 자녀교육 6  (0) 2012.02.16
축복하는 자녀교육 5  (0) 2012.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