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3.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게 아니라 구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지 구속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면 우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지요? 기독교적인 진리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이는 결코 자유로울 수도 구속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으면서 진리가 자기를 구속한다거나 자유케 한다고 합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그냥 개념으로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과서적인 지식은 머리로 알면 깨달은 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그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걸까요? 당연히 아니겠지요. 이때에 진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느껴야 그제서야 어머니의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아야 진리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진리는 무엇일까요? 기독교적인 진리는 성경책 자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나 좀더 압축하고 압축해서 서너 마디로 압축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기독교적 진리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베푼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나를 지으셨다. 그러나 나는 죄인인 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베푼 진리일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하신다는 언약의 진리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나에게 준 사명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진화되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입니다. 여기에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구약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신약에서 더 진화된 명령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은 것처럼 나도 내 이웃을 위해 죽을 만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이웃은 가족을 포함한 내 주변의 모두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그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거룩한 열정입니다. 사랑없이 결코 땅끝까지 복음을 들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진리가 무엇인지 나왔습니다. 우리가 진리 속에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완전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과 믿는 자를 구원한다는 역사를 완전히, 100% 믿지 않으면 진리 속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둘째, 이웃을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믿음이 없으면 진리 속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 속에 거해야만 자유로운 것인데 진리 속에 거하지 않으면 당연히 자유로울 수가 없겠지요.
지난번 논의에서 나온 헌금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는 좋은 도구가 헌금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세뱃돈을 받으면 어머니가 다 보관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우리는 어머니를 완전히 믿으므로 어머니가 그 돈을 보관하는 데 대한 반감이 전혀 없습니다. 어차피 어머니가 모든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하나님께 내 돈을 드리는 게 아까울 수가 없습니다. 내 사정이 안 되어 못 드리는 게 안타까울 수는 있으나 돈을 드리는 것 자체가 아까울 수 없지요.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헌금 문제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에 오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라고 정말로 믿는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겠지요.
고백하거니와 저도 이 부분에서 너무나 많이 넘어졌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이제야 온전히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것을 받아주시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것은 받지 않고 토해내십니다. 설령 인간인 목사가 받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돈을 받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알까요? 성경에 써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것을 완전히 믿어야 우리가 진리에 거하는 겁니다.
진리에 거하지도 않으면서 진리가 자유롭게 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공기를 마시지도 않은 사람이 공기를 마셔도 죽더라고 말하는 건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일단 공기를 마셔야 살 수 있는 것이고 정말로 진리에 거해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의자 신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매님께서 의자에 앉을 때는 의자가 부서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의자에 앉을 때는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앉으면 의자가 부서질 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태에서 남들이 볼 때 앉는 시늉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이지 5초를 앉아있기도 힘듭니다.
믿음이란 의자에 대한 믿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믿으면 편하고 자유로운 의자에 앉는 것 같스빈다. 하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면 앉아있는 척 해야 하므로 너무나 힘이 듭니다.
또 악명높은 나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의 예를 들겠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을 석방시켰습니다. 감옥에서 나간 많은 유태인들이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살던 세상밖에 알지 못한 것입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평생을 감옥에 살던 노인을 석방시킵니다. 그러자 노인은 석방 하루 전날 목을 메고 맙니다. 세상에 나가서 살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훈련받은 코끼리는 나중에 고삐를 풀어줘도 절대로 자기 영역에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더 넓고 자유로운 정글이 있지만 훈련받은 코끼리는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원래 좁디좁은 죄의 영역에 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진리의 영역으로 문을 열어 주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감옥으로 되돌아옵니다. 내가 살던 방식을 고집합니다. 그곳이 편하고 좋습니다. 진리의 영역은 그 문 밖에 있는데 절대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저 바깥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저곳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저긴 정말 불편한 곳이다."
좀 납득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짧은 이론으로 자매님의 마음을 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순간 하나님께서 자매님의 가슴을 열어주시면 진리가 자매님을 자유케 할 줄 믿습니다.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조차 진리에 머물지 못하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보십시오. 진리에 머물러 자유로운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진리에 자유로운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자유로운 자는 어떤 자일까요? 바울은 그렇게 말합니다. 자기는 매일 죽는다고. 그렇습니다. 죽은 자는 자유롭습니다. 현실에 얽매지 않으면 자유롭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다. 죽은 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을 매일 가슴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리 속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누군가를 볼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 오늘도 제가 죽습니다. 죽은 저를 오늘도 구원해 주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 사랑을 실천하고 끝없이 복음을 전하면 곧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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