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묵상하는 하루

건강한 공동체는 갈등한다(사도행전 15장:36-39)

강 영 길 2011. 12. 8. 13:17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받는 이유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 때문이다.

상처를 받는 원인을 따지자면 개인의 쓴뿌리이거나 상대방이나 그 체계의 잘 못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공동체 생활에서 갈등의 의미만 짚어보려 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기대감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는 갈등이 없어야 한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바로 이 기대감이 상처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교회는 공동체이므로 반드시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은 서로 친밀해질수록 더 많은 갈등을 만들게 된다.

친밀해진다는 것은 점점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기름과 물이 만났을 때 두 액체가 용해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엄청난 횟수를 저어야 겨우 물인지 기름인지 구분되지 않은 상태가 된다.

두 사람이 만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물이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기름이다.

그래서 두 사람 이상이 만나면 서로 하나가 되는 데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성경을 뒤져보면 이와 같은 성격의 사건이 꽤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 바울과 바나바의 싸움이다.

사도행전 15장 36절에서 39절을 보자.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이들이 싸운 뒤 바나바는 아예 사도행전에서 사라져 버린다.

얼마나 심하게 싸웠으면 더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을까.

이들의 싸움을 보면서 나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성자들도 싸우는데 나같은 사람이야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늘 싸우라는 말이 아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갈등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갈등이 없을 것을 기대하면 혼자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다, 갈등이 없기를 바란다면 아예 살 수가 없다.

한 개인의 내부에서도 갈등은 끝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동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숙하지 못하면 갈등 자체를 부인하려고 한다.

갈등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바다에 나간 사람이 파도가 치지 않을 것을 기대한다면 아예 바다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바다이므로 당연히 파도가 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나오면 당연히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셀 수도 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발견한다.

왜 그렇게 사랑을 강조했을까?

갈등이 없다면 사랑이 필요나 할까?

사랑이 필요한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에게는 갈등이 있으므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수많은 의견들이 제시되고 다양한 사람이 모이므로

반드시 갈등이 일어난다.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미 다들 사랑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사랑하라는 말인 쓸모없는 잔소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까닭이 서로 갈등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갈등이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을 사랑으로 해결하는 공동체다.

나의 성격과 다르지만, 나의 주장과 다르지만 내가 모든 것을 참는 게 공동체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성격과 다르고 나의 주장과 다를 때 서로의 성격과 주장을 모두 앞에 내놓은 뒤

그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사랑으로 해소하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다.

다시 말하면 갈등 없는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이며 사랑도 필요없는 공동체이며

심하게 말한다면 갈등이 없는 공동체는 공동체가 아니다.

이미 있었던 갈등을 극복했으므로 갈등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성숙한 공동체다.

그러나 성숙한 공동체도 늘 새로운 갈등은 나오게 마련이다.

 

진주를 캐려는 사람이 바닷물에 발을 담그지 않고선 진주를 캘 수 없다.

갈등을 하지 않고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갈등 없음"을 바라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갈등이 없지 않았느냐고.

 

과연 그럴까?

예수님처럼 갈등이 많았던 분은 없을지도 모른다.

우선 예수님은 세상과 대적해야 했다.

둘째, 사탄과도 대적해야 했다.

그런가 하면 추종자들인 제자 그룹들과도 갈등했다.

가령 야고보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천국 우편에 앉혀 달라고 하는 데서도 

예수님은 그 여인을 꾸짖는다.

어린아이가 예수님에게 오려고 할 때 제자들이 말리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는다.

베드로가 관원의 귀를 자를 때도 예수님은 그러지 말라고 한다.

걸핏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고 깨우친다.

그 갈등의 극단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사건이다.

 

어디 그러기만 했을까?

가장 완벽한 공동체인 삼위일체 하나님도 스스로 갈등을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두려워했으나 결국 주님 뜻에 맡겼다.

십자가의 고통을 즐거워한게 아니라 성부이신 하나님에게 고통을 호소한다.

생각해 보면 삼위 하나님이 스스로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으로 덮은 것이다.

 

갈등 없는 공동체는 없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갈등없는 공동체를 기대해선 안 된다.

갈등 많은 공동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갈등을 통해서 내 사랑의 몸무게가 얼마나 되는 지를 알 수 있다.

공동체의 갈등은 내 사랑을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

갈등없는 사랑은 피상적이고 열매없는 사랑이다.

 

바다에는 늘 파도가 치게 마련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멀미를 할 준비도 하게 된다.

갈등없는 교회, 갈등 없는 공동체를 찾는 사람은 아무 교회도 다닐 수 없다.

그러면 상처받고 싶지 않거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될까?

내부의 갈등이 더 커지고 그로 인한 상처가 더 커진다.

사랑을 체험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나갈 때, 필연적으로 갈등을 체험한다. 우리는 그 갈등을 담을 그릇을 갖고 공동체에 가야한다.

아울러 그 그릇을 씻어줄 사랑이라는 세척제를 들고 가야 한다.

물론, 가장 완벽한 사랑의 세척제는 예수님의 보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