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로마서

로마서 12장

강 영 길 2012. 10. 24. 08:17

12장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것, all he has done for you 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행하셨기에 나는 하나님께 나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드리는 게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나에 대한 주권이 없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즉 이 세상을 그대로 따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내가 세상이 하는 그대로 따라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금한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게 아니라 이 세대가 행한 그대로를 행하는 나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나는 세상의 복사판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복사판이 될 것인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하나님이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내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내어드리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바꾸신다. 하나님은 나의 사고방식을 바꾸어서 새 사람으로 교체 시킨다. transform은 부분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형태나 성질을 완전히 바꾼다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께 나를 내어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버린다는 말이다. 내가 바뀌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어드리는 것은 나의 의지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 단순한 것을 하길 원하신다.

그 뒤에 오는 구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그것은 변화된 다음에 내가 노력하여 가야할 단계가 아니라 변화가 되면 자연스런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문장 구조를 바꾸면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너를 하나님께 내어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완전히 변화시켜서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문장을 고치면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 노력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할 것도 없음이 명백해진다.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나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하나님께 나를 내어드리자.)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바울은 우리가 실제 가진 것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교훈한다. 교만이란,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내가 더 인정받아야 하고 내가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들이 발생한다. 나는 실제 나보다 더 나은 자일 수 없다. 그러니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나와 내 자신을 비교해서 실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인정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은사보다 가치 있는 것은 성령의 열매다. 오이가 수박이기를 바라면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 내가 오이면 오이, 토마토면 토마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대로 쓰임받기를 바라야 한다.)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모든 구절이 뼈를 후벼내는 내용이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줄여본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이다. 내 손가락이 없으면 입이 내 손가락을 대신할 것이요 내 다리가 없으면 내 손이 내 다리를 대신할 것이다. 내 왼손이 무거우면 오른손이 들어줄 것이고 내 왼쪽 코가 막히면 오른쪽 코로 숨을 쉴 것이다. 믿음의 형제는 바로 그러한 관계로 존재한다.)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먼저 존경하라는 말을 묵상해 본다. 원어에서는 서로 존경하기를 기쁨으로 하라고 되어있다. 존경하는 게 기쁘면 내가 먼저 존경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상대가 먼저 존경을 표하면 나중에 존경하라는 게 아니다. 동시에 서로를 존경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존경하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존경할 만한 자를 존경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존경하는 데는 조건이 없다. 믿음의 형제를 그냥 먼저 존경하면 된다. 어쩌면 바울은 이 말을 다른 구절에도 다 붙이고 싶었을지 모른다. 모든 은사와 모든 섬김을 내가 먼저,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무언가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은사인 분자에 비해 섬김과 사랑인 분모가 너무 크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할 의무는 많고 그에 반해 은사는 적은 셈이다. 하나님이 너무 인색하신 것일까? 아니다. 분모가 클수록 은혜가 많은 것이다. 분자인 은사는 내가 교만해지기 쉬운 것이나 분모인 섬김과 사랑은 내가 낮아지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들이다. 내가 낮아지는 것이 최고의 은혜요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나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가? 그러면 분모를 최대화하여 살아야 한다. 내가 최대의 분모가 되면 아주 작은 분자를 가졌다 할지라도, 아주 작은 은사 하나만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와 인간에게까지 의로운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다.

은사는 일종의 꽃이요 섬김과 사랑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다. 나는 생명을 얻어 빛나는 꽃보다 생명을 주는 나무와 뿌리가 되는 게 더 좋다. 의로운 아들이라 칭함 받아야 만족하는가? 그렇다.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아들이라 칭함받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최대의 분모를 키워가야 한다.)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 구절들은 아이러니 문학을 생각하게 한다. 바울은 6절에서 8절까지는 우리가 받은 은사가 다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의 은사 등 모두가 다른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9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으로 보면 결국 이 모든 은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6절에서 8절까지가 분자라면 9절부터 13절의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분모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로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선하게 살고, 먼저 존경하며,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소망을 갖고 인내와 기도에 힘쓰고 성도들이 쓸 것을 내가 주고 손님을 접대하라는 것이다.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기,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기, 악을 선으로 갚기, 원수의 필요를 채워주기, 악을 선으로 이기기,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지혜로운 자라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곧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 곧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라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지도 못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낮아질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낮아지게 된다. 내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면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지 못한다.

내가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함께 울거나 함께 웃을 수도 없다. 나는 그 정도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나는 그 정도의 기쁨도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아픔이 아픔인가? 그 정도의 슬픔이 슬픔인가? 나는 그보다 더한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동감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함께 우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가 싶다. 함께 기뻐하는 것은 더욱 더 큰 사랑이 아닌가 싶다. 함께 울어주기는 할 수 있어도 함께 웃어주기는 어렵다는 고백이 인간의 이기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 같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이 내 마음에 가득하길 빈다.)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나 원수를 축복하는 것도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꿈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적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도 나의 부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용서도 사랑도 내 부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내가 아는 척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한다. 내가 인정받고 싶어하면 친구나 이웃도 나를 싫어한다. 하물며 적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면 인정해줄 적이 있을까? 오히려 나를 해치려 들지도 모른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부터 버려야 한다.)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한 바울도 모두와 화목하진 못했다. 오죽하면 바울이 ‘할 수 있거든’이라는 조건을 달았을까? 모든 사람과 화목하긴 불가능하다. 선과 악의 문제에서 대립할 땐 더욱 그렇다. 예수님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마도 가능했겠지만 그것을 택하지 않았다. 반드시 화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 아닐까 싶다. 분쟁을 일삼는 것은 나쁘지만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옳다.)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유대인은 숯불이 꺼졌을 때 화로를 머리에 이고 이웃에게 빌리러 간다. 그때 이웃이 숯불을 주는 것이 선행이다. 따라서 숯불을 쌓는다는 것은 내가 선행을 쌓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선행에 따라 갚으리라는 믿음이다. 반대로 우리가 사랑으로 대했을 때 원수는 머리에 숯불을 얹은 것 같은 창피함을 느낀다. 나의 겸손과 사랑이 원수를 부끄럽게 한다. 이는 원수에게 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기라는 것이다.

친구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원수가 그러할 때 먹이고 마시게 하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가족이나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 원인 또한 교만에 있다.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가족이나 이웃조차 덜 사랑하게 한다. 나의 사랑이 부족하고 나의 지식이 부족함을 인정하자.)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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