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두 권의 책은 유소년기에 있는 수많은 우리 나라 아이들이 읽은 책이다.
두 권의 책을 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월이 가면 책의 내용을 거의 잊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권의 책 중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좀더 기억을 하지만 <꽃들에게 희망을>은 애벌레 나오는 책, 정도로 기억을 한다.
하지만 두 책을 잘 뜯어보면 <꽃들에게 희망을>이 훨씬 의미 심장한 책임을 어렵잖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이 책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물론 이 책을 너무 어려서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저 유소년이 읽을 만한 책이 결코 아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심오한 철학적 사고를 할 무렵에 읽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만 보이면 유소년이 읽을 책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일까? 이 책을 너무 어린 시절에 읽고 만다.
청소년이 읽기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훨씬 인상적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배워온 금욕적 가치와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한하게 퍼주어야 옳은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히 볼 땐 참 맞는 말이다. 말하자면 착하게 살자는 표어와 일치하는 제목이고 내용도 그러하다.
그러나 <꽃들에게 희망을>은 좀 어렵다. 이 책은 아무리 발버둥치고 살아도 우리가 사는 일상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그려두고 있다. 이 책에서 많은 애벌레들은 자신이 벌레같은 경쟁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인생을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도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아는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선 그런 슬픈 우리의 현실을 뛰어넘을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은 나비가 되는 길이다. 나비가 되면 이런 현실과 달리 살아갈 수 있다. 나비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현상의 자아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새로 태어난 후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깨달음없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단지 율법적이요 윤리적일 수 있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사회가 요구한 도덕률에 이끌려 내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삶에는 기쁨이 없다. 단지 의무만 있을 뿐이다. 깨달음 없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그야말로 제자리에 꼼짝도 못 한 채 묶인 나무다. 깨달음이 없는 나무에는 생명이 없다. 내 생명을 다 빼앗기면서 주는 나무는 단지 죽은 나무일 뿐이다.
그러나 나비가 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나비는 생명이 있고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과같이 나비가 되는 것은 '아낌없이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꽃들이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일을 한다. 나비는 자신에게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을 꽃들에게 아낌없이 전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라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되어야 한다. 무언가 의무적인 짐을 지는 헌신이 아니라 즐겁고 기쁘고 자유롭고 빛나는 헌신을 해야 한다. 자유가 없으면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며 생명이 없으면 의무적이고 강요된 희생만 있을 뿐이다. 그런 희생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지옥에 머무는 인생이다.
우리는 각자의 내면에 한 마리씩의 나비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나비를 나비로 만드는 자는 극소수일 뿐이다. 우리는 내 안의 나비를 아름다운 나비로 탄생시킬 권리가 있다. 한 마리 나비가 되지 않는 채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다면 그 나무는 단지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매말라 죽어 있는 그루터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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