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묵상하는 하루

내 입은 판단하고 싶다?(요한복음 8장:4-9)

강 영 길 2011. 12. 23. 00:53

"기독교인은 말만 잘해."

살면서 이런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적어도 한번 이상 들어본 적이 있다.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보고 그렇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상처를 받거나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다른 교인이 나를 평가하는 경우다.

 

참 묘하게도 교인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 자신에게 하는 상대의 모든 말이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 성경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정죄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은 끊임없이 타인을 규정하고 정죄하는 사람. 자기의 정죄는 허용하면서 타인이 자기 생각에 반대조차 하면 안 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정말 많은 것 같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성경적으로 본다면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결과다. 말로야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겠지만 가슴으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또 교인들과 관계를 하다보면 사람들이 참으로 무언가 유형화시키고 정형화시키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유형화시키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끝도 없이 상대를 정의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은 산만해. 그 사람은 A형이야. 그 사람은 나약한 부분이 있어. 그 사람은 권위적이야. 그 사람은 하는 짓이 이상해."

 

이런 말들을 잘 들여다 보면 기준이 모호한 말들이다. 도대체 얼마나 산만하며 A형은 어떻다는 것이며 뭐가 어떤 정도로 나약하다는 것이며 이상한 기준은 무엇인지. 사실 이런 종류의 규격화는 들을 필요가 거의 없는 말이다. 그 기준이 판단하는 자기 자신의 성격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즉 자기 기준이지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매우 논리적인 비판을 하기도 한다. 분명한 잣대를 대고 말한다. 당신의 행위는 십계명 중 5계명을 위반했다. 이쪽 뺨을 때리면 반대편 뺨도 대야 한다. 레위기 몇 장 몇 절에 이런 말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율법적이다. 그래서 앞에서 기준도 없는 사람들의 말보다는 좀 들을만 하다.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저런 모든 비판에 대해 예수님이 철퇴를 내리치신다. 그 사건이 간음한 여인 사건이다.

요한 복음 8장 4절에서 9절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웬만하면 한번씩은 인용해볼 만한 유명한 사건이며 유명한 구절이다.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힘든 명제를 던지셨다. 죄있는 자는 돌로 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이런 아픈 이야기를 한다. 로마서 2장 1절에서 3절이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이 정도가 되면 기독교인은 절대로 아무 말도 않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우리는 늘 입이 근질거린다. 정말로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일까? 우리가 이성적이고 성경적인 분별까지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여호수와와 갈렙이 정탐을 다녀와서 동료들에게 반대하고 그들의 판단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미가야 선지자의 용기있는 발언이나 엘리사가 자기를 놀린 어린이를 처죽인 사건 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 비판하실 수 있다고 치자. 그러면 바울은 왜 때로 동료들에게 반대 의견을 내거나 교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충고를 했을까?

 

성경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을 자구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고민을 오래 해 봤다. 그러다 오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외향적이다 보니 내 감정이나 계획을 실천하기 전에 발설하곤 한다. 그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한다. 혹은 말만 앞선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전부는 아니라도 내가 먼저 발설하지만 그 발설한 것을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말이 없는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자기 계획을 먼저 발설했다 치자. 그가 그 발설한 것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를 말만 앞선 사람이라고 할까?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는 말만 앞선 사람이다.

 

우리가 말만 앞선 건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실천성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 만일 발설하고 실천하면 말만 앞선 게 아니다.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말만 앞선 것이다. 외향적이면 나쁘고 내성적이면 좋다는 인식, 침묵은 금이라는 선입관이 실천력있는 외향적인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곤 한다.

 

다시 본류로 가보자. 말을 하다보면 비판이나 비난, 혹은 정죄까지 하게 된다. 예수님은 여인을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지 그 여자에 대한 판단까지 금하진 않았다. 그 여인이 돌맞을 짓을 했다는 것은 예수님도 인정을 하신 것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존중한 셈이다. 그 여인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너무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 비판은 따로 생각할 문제다.)

 

다시 바울로 가보자. 바울이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라고 했을 때 그 판단은 무엇일까? 내가 사랑하는 내 자녀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충고하지 말아야 할까? 자녀와의 관계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성경말씀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정말로 충고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비판이나 비난할 때 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내 안에 쓴뿌리가 있고 분노가 있을 수 있다. 혹은 정죄하려는 마음에서 할 수 있다. 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상대를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 무엇인가 내 마음에 걸림이 있고 찌꺼기가 있는지 자기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이런 경우 비난이나 정죄나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 아닐까? 우리는 상대의 상황까지 다 고려한 종합적인 판단을 했을 때 우리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내 마음을 나는 얼마든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렇게 들여다 봤을 때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나를 위한 것이 있다면 내 화를 풀기 위한 욕망이 있다면, 내 억울함을 풀려고 한다면, 나를 높이려고 한다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상대에게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그때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상대에 대해 정말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내 마음에 일말의 분노가 없으면 깊은 바다처럼 평온한 상태에서, 상대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긍휼한 마으밍 있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라는 게 확실할 때 우리는 상대를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권면이 아닐까.

 

단지 칭찬만 해주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독교는 무엇이건 다 받아줘야 성경을 이룬 것이라는 오해를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젖먹이 아이들에게나 해당되는 말 아닐까? 아이가 칼날에 찔릴 상황인데도 칭찬만 해준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사랑일까? 옳고 그름조차 구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한데 우리는 양비론적인 태도를 이상으로 삼아버린다. 그리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말까지도 정죄와 비난으로 몰아간다.

 

이런 잘못된 동조를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사실은 우월감이 내재되어있다는 것이 무서운 사실이다. 분별력있는 말하는 사람을 궁지로 몰거나 비방하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견지하려는 것이다. 쓴뿌리에 동조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근거로 성숙한 사람들의 분별력있는 사고까지 막으려는 경향이 있다. 또 사랑을 전제로 한 충심어린 권면도 정죄로 몰아세우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일이 잘 못 돌아가도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럴 때 하님께 간구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판단하고 행할 능력을 주셨다. 그게 자유 의지 아닌가? 우리가 선한 자유의지를 사용할 특권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의 이름을 당신이 짓지 않으시고 아담에게 짓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잘못된 것을 잘못 되었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러한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과제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 아닐까?

"지금 네가 상대에게 말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 봐라. 너의 욕심을 위한 것은 아닌지. 너의 가치관이나 눈에 거슬려서 하는 말은 아닌지. 네가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닌지. 너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닌지. 네가 다 다스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흉보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네가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네가 속상하니까 막무가내로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닌지."

 

물론 권면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술 이전에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그에게 하는 말인지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정말로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끗하다면 상대에게 권면해도 좋을 것이다.

 

상대방이 권면으로 인해 화를 내고 나를 비난하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서 말을 하면 상대가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약해서 그것을 못 알아듣고 나를 비난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지 않을까? 하나님께 그를 올려드리는 수밖에.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무책임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래서 관계를 형성하며 살게 하신 것이라고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