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이 구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다 이루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한 뒤 다 이루었다고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창조가 다 이뤄진 것과 십자가의 죽음이 이뤄진 것은 모순되지만 사실상 같은 의미이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시므로 세상은 타락 전의 상태, 즉 천지창조의 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곧 천지창조의 복원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 창조나 천지 창조의 복원이나 동일한 의미, 그 의미의 핵심은 곧 사랑이다.)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이 구절에는 안식의 묘한 의미가 숨어 있다.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마치고 안식을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하던 일을 끝내지 못하고 안식을 하려고 한다. 안식일에 단지 일을 쉬는 게 아니라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일한 자만이 쉴 자격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믿지 않는 자에게는 사실상 안식이 있을 수 없다. 믿는 자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몸이 쉰다고 해도 거기에 안식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월요일엔 자살을 많이 한다. 안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쉬는 날이라도 평화가 없다. 그날은 오히려 부부싸움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안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덴동산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은 6일째인 2장 27절에서 이미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 사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세상에 만드셨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택한 자가 에덴에 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나중에 가인을 죽이려 한 네피림 사람들 등으로 볼 때 아담 외에 다른 사람도 만들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때도 이미 사람이 땅을 간다는 걸 전제하고 있다.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땅을 간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는 땅을 갈면서 인간이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한 것이다.)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하늘과 땅을 만드시던 날에 초목을 주지 않고 채소도 없었다고 한다. 그 까닭이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하다못해 식물 하나라도 사람의 손을 통해 일하신다. 사람이 없는 곳에 생명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생명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만일 눈이 멀거나 입이 없어도 살 수 있다. 하지만 호흡이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을 코에 불어넣으셨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입으로 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비방을 하기도 한다. 눈은 사물을 식별하면서도 가장 악한 일에 취약한 감각이다. 귀는 소리를 식별하기도 하나 나쁜 말에 가장 민감하다. 그러나 코는 이런 악한 감각에 쓰기에는 가장 불편한 감각이다. 오직 코만이 인간이 악을 행하는 감각적인 도구로 잘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코에 영을 넣지 않았을까?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이, 아니 동물이 사랑에 빠지는 결정적인 감각이 후각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대체 왜 후각을 택하셨으며 왜 사랑에 빠지는 결정적 감각으로 후각을 사용하셨을까? 시사하는 점이 큰 대목이다.)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하나님이 사람을 거기 두셨다.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하고 보호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가장 안전한 곳, 균이 없는 곳, 가장 포근한 곳에 아이를 두는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7절 묵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곧 시각과 미각에 의해 현혹되기 쉬움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죄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보기에 좋은 자동차, 좋은 옷, 좋은 집, 그리고 술이나 음식 등 먹는 것에서 모든 죄가 출발하고 있다./하나님은 두 개의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셨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다.)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강이 에덴에서부터 흘러서 그냥 흐른 게 아니라 동산을 적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동산을 적시며 흐름은 물론 세상의 은혜와 축복의 근원이 된다.)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작을 시키고 지키게 했다. 인간이 노동을 안 한 게 아니다. 노동을 했으되 수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은 고통이 아니다. 노동에는 즐거운 노동이 있고 고통의 노동이 있다.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의 노동은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노동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힘들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나 나의 만족을 위한 일이나 세상을 위한 일은 힘들다. 이것이 타락 전의 경작과 타락 후의 노동의 차이다. 다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노동은 즐거움이 되고 하루하루가 에너지 넘치는 삶이 된다.)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주셨다. 단지 극소수의 원칙만 지키라고 한다. 우리는 실로 많은 일을 자유의지로 한다. 그리고 극소수의 말씀만을 지키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영역조차 우리가 마음대로 하고자 한다. 그것이 불순종의 원인이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즉 내가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것이다.)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이다. 죄란 무엇인가? 아주 단순하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다. 선악과를 먹어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죄다. 따라서 선악과를 먹은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죽게 된 것이다. 선악과는 대부분 내 삶에서 묶인 무엇과 관계있다. 내가 돈을 중시하면 돈이 선악과가 되고 명예를 중시하면 명예가 선악과가 된다. 내가 묶여 있는 그 무엇이 선악과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의 중요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선악과에 대한 명령을 직접 들은 이는 아담이다. 하와는 나중에 아담으로부터 전해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으면 확신이 적고 흔들리기 쉽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 나가 음성을 듣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돕는 것은 힘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돕는 법이다. 그러니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있거나 적어도 대등한 존재로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 약한 자가 돕는 것은 ‘도와주기도 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니 돕는 자는 약한 자가 아니다.)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은 생물을 창조하시되 이름을 붙이는 즐거움은 아담에게 주셨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의 관계를 그만큼 존중했던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 능력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말씀에 어긋남을 볼 수 있는 구절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다. 하나님이 할 수 있으되 우리가 스스로 하라고 지켜보신다.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려고’라는 말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존중하는 지를 보여준다. 아이가 탄생하면 무거운 가문에서는 조부모가 이름을 짓는다. 후손의 이름을 짓는 것은 그만큼 의미있는 일이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데 하나님은 그 의미있는 권위를 우리에게 양보하시고 넉넉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를 존중하신다. 게다가 직접 끌고 가시기까지 했다. 어쩌다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부러 데려가서 그 일을 하게 하셨다. 나에게 주어진 만남이나 사명은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부여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하나님이 나에게 준 선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괴롭힘의 대상이 아니라 이름 짓기의 대상이다. 누가 이름을 지으면서 그 대상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미운 대상은 아예 이름조차 짓지 않는다. 세상을 인식하고 의미있는 사랑의 눈으로 보자.)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이름을 먼저 지은 다음에 아담에게 “너는 내가 지은 대로 부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주도적인 분이 아니다. 홀로 영광받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전적인 즐거움을 주시고 그것을 지켜보시는 영광을 받으시는 관대한 분이시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오늘날도 병원에서 마취를 하여 수술을 한다. 깊이 잠들지 않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잠들게 한 게 아니라 깊이 잠들게 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짝을 지워주시는 그 즐거운 일을 하면서 고통을 제거하셨다. 우리가 배우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고통받길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잠든 상태, 가장 편안하게 배우자를 주신다. 하지만 이를 깬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이 전권을 행사하시도록 잠들지 않고서 자기 눈을 뜨고 자기 눈으로 배우자를 만들고자 한다. 그런 사람은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은 아담에게로 이끌고 가셨다. 다시 말하면 여자가 온전히 생령을 가질 때까지 하나님이 관리하셨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기 전에 여자를 취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하나님이 이끌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앞에서 생물들도 이끌어오신 것처럼 여자도 이끌어오신다. 하나님은 모든 만남을 직접 주관하신다.)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여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이다. 아담이 대상에게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름은 곧 의미이므로. 이름을 짓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름 모를 꽃을 만나면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 이름을 붙인다. 반드시 자기 상상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 만일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예 이름 부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여자라는 이름을 붙인 순간 아담의 가슴에 하와가 들어온 것이다. 그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으니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부를 이렇게 맺어주셨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는 것은 자기 살이나 뼈를 해하는 것이므로 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그만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뼈가 금이 가면 너무나 고통이 심하며 부러지면 더욱 심하다. 부부 갈등은 그와 같은 것이다. 또 아내가 몸이나 마음이 아픈 것은 내 뼈가 아픈 것이니 나도 아파진다. 그런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배우자를 준 순간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 아내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동안 아담은 하나님과 하나였다. 이때는 오직 하나님과만 소통하는 수평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결혼한 순간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가 이뤄지면서 아담은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로 들어선다. 수직적 관계는 매우 위태로운 관계다. 언제 그 선이 끊어질지 모르는 관계다. 따라서 인간이 연합할 때가 하나님의 은혜가 깨지기 가장 쉬운 때다. 사람들은 서로 공동체를 만들면서 죄를 짓기 시작하고 비방을 하고 거룩한 질서를 무너뜨리기 쉬워진다. 특히 그 공동체가 이성간의 공동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나를 드러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았던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다. 세상 만물과 부부간에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죄를 지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부부간에 연막을 치고 세상 속에서도 연막을 치고 하나님 앞에서도 연막을 친다. 자신의 죄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때의 인간관계는 참으로 투명한 관계다. 하지만 죄를 지으면서 우리는 비밀 번호를 만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