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세상과 교회를 향해

영화 <귀향>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을 아쉬워하다

강 영 길 2016. 3. 4. 23:43

영화 <귀향>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을 아쉬워하다


오늘 종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 소녀들의 아픔과 우리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무당을 통해서 그들의 아픔을 알게 되고 굿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씻는 행위는 아무래도 내 마음에 걸렸다. 기독교인인 내가 당연히 겪을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아쉬움에 가까웠다. 예언이나 계시나 꿈을 통한 하나님의 현현 등을 동원해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기독교적 콘텐츠로 살려내지 못 한 데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계에서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법 있다고 한다. 샤머니즘을 활용하는 영화는 기독교 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샤머니즘에 빠질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그 영화를 보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종군위안부를 돕는 일에 사용하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일견 맞는 것 같다. 특히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감히 샤머니즘이라는 우상숭배의 영화를 봐서 되겠는가 하는 당위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의 목소리는 영화의 줄기를 보기보다는 가지만 보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어서 그 점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우선 샤머니즘 영화를 본다고 해서 모두가 샤머니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영화를 본다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와 다른 생각은 보지도 말아야 한다면 기독교인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런 문제제기보다 더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그 당시 종군위안부 모집에 앞장선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기독교인들이었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의 주류들은 위안부 문제 등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도우려 하기보다는 거의 그들의 아픔을 우롱하는 수준으로 행동해 왔다. 그들더러 잊으라고 하고 용서하라고만 강요했지 그들의 괴로움을 우리가 함께 풀어주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반대로 그 할머니들이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까지 몰아세우고 할머니들의 상처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사탄의 자식이라고까지 몰아세우는 입장이었다. 걸핏하면 종북세력이라거나 빨갱이로까지 몰아세웠던 것은 한국 사회 주류와 한국 기독교 주류가 저지른 죄악이다.


이번에 이 영화가 개봉되기까지 진통이 있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상영관을 찾을 수도 없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을 그린 영화가 이 땅에서 상영관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친일이라는 원죄를 가진 자들이 아직도 이 사회의 최상류층이며 지도자그룹이거나 통치 세력이기 때문이다. 친일분자들은 종군위안부 문제에 전혀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그 영화마저 상영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에 동조했던 주요 그룹중 하나가 기독교 주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 영화에 샤머니즘적 요소가 많다고 우리가 그들을 탓하기엔 부끄럽다. 그러려면 저런 영화 나오기 전에 한국 기독교가 자금을 조달해서 저런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영화를 비판한 자들이 영화 볼 돈으로 그분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낯부끄러운 주장이다. 지금까지 탄압하는 입장에 있다가 정작 영화가 나오니까 그런 주장을 하기엔 기독교인의 입장이라기엔 너무 낯이 두껍다. 이런 영화 나오기 전에, 영화 만든 사람들 비난하기 전에 우리가 그분들 위해서 단돈 만원이라도 헌금해본 적이 있는가,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본적이 있는가를 먼저 반성해야 한다. 단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다고 해서 비난하고 있기에는 기독교인으로서 내 양심이 부끄럽다.


나는 그 영화에 샤머니즘적 요소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어지지 않았고, 그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저런 문화적 콘텐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겠구나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들의 아픔을 위로했으면 영화를 만든 사람도 기독교적 해석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어떤 자들보다 힘이 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그래서 우리는 남들보다 더 관대해야 하고 더 관용적이어야 한다. 자꾸만 꼬투리잡기 식으로 협소한 주장을 하면 사회와 점점 벽을 쌓을 뿐 아닌가 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더 분발해야 한다. 불의한 것에 분노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함께 울어주는 삶이 예수님이 보여준 삶이다. 우리가 아픈 자의 이웃이 될 때 하나님 나라는 점점 확장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