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세상과 교회를 향해

내 친구 송목사에게 묻다

강 영 길 2016. 10. 4. 21:51

내 친구 송목사에게 묻다-강영길


송목사, 가을 하늘이 쾌청하네. 오늘은 눈썹 같은 달이 떠서 더 아름다운 밤이네. 예전 선조들은 친구나 친지끼리 참 깊이 있는 대화와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요즘은 갈등이 두렵고 서로의 신념의 차이가 귀를 열기보다는 닫게 하는 힘이 더 커서인지 다들 주장을 덮어버리려고 하지 결코 자신의 의견을 내어 놓고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네.


그것이 아마도 현대 사회의 무서운 병인, 두려움이 아닐까 하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이요 두려움의 반대는 믿음이라면 귀를 닫아버린 자들이 과연 믿음이 있는 건지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네.

지난번 송목사가 방문했을 때 나와 대화를 나눴고 그 후로 내가 글을 하나 보냈으나 무응답으로 대응한 걸 보면서 입장의 차이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정도로 두려움이 깔려 있거나 귀를 여는 것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우리들이 갇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네.


사실 나는 송목사가 다녀간 뒤 내 귀에 쟁쟁하게 남은 말이 하나 있네.

“이단으로 묶었는데 풀 거면 왜 이단으로 묶은 거야? 묶었으면 풀질 말든지, 풀 거면 묶지 말든지.”

이렇게 송목사가 말을 했네. 상아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사고의 폭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사람들이 상아탑에 있을 거라고 나는 믿네. 그래서 송목사도 여러 모로 그런 넉넉한 인품과 사상, 믿음의 신학적 영역을 가졌으리라 믿고 있었네.


이번 총회에서 이단 특별 사면 문제는 거부되었네. 물론 따지고 보자면 문명사회가 법적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근거로 볼 때 무법하게 거부된 것이지. 사면을 허락한 100회 총회의 결의가 101회 총회에서 묻지 마 투표 형태로 뒤집혔으니 이거야 말로 반문명 사회 아닌가 싶네.

사면위원회에서 발표한 문구들을 들여다보면 충분한 사면의 근거도 있어 보이지만 그 누구도 이성적인 질문을 원한 것 같진 않네. 총회에서 단 한 명의 반대 논의도 없이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마녀사냥처럼 끝났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한국 교회가 얼마나 비민주적인가를 능히 들여다 볼 수 있었네. 그 많은 총대들 가운데 왜 반대자가 없었겠는가? 말해서는 안 되는 분위기에 압도당했을 것이네. 총회장을 이단 연루자라고 매도하는 한국 교회에서 일개 목사가 자신도 이단으로 지목당할까 봐 두려웠을 것이네. 하나님은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데 인간들 특히 목회자들이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는 한국 교회의 불행한 얼굴을 인정해야 하는 게 서럽네.

상황을 좀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번에 총회가 최 목사에게 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네. 최목사가 공언한대로 총회보다 자신의 결정이 더 힘이 있음을 증명한 셈이네.


송목사가 최 모 목사에 대해서는 아마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고 황모 목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게 그날 나의 느낌이었네. 그런데 나는 오래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몇 번 대화를 해 보면 알겠데. 내가 몇 번 본 황 목사는 사람이 진솔하데. 여기저기 부딪쳐서 그런지 좀 거칠기는 했네만, 그 사람은 결코 사기를 칠 인품이 아니었네. 그 사람의 가슴에 타오르는 (열정이 아니라)진정성이 있었네. 타오르는 진정성이 있는 사람은 때로 거짓말은 할 수 있지만 사기꾼이 되긴 어렵다고 생각하네. 그런데 그날 송목사는 만나보지도 못한 황 목사에 대해 사기꾼이라는 말을 사용했네. 그게 참 마음에 걸렸네. 만나보지 않은 사람을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점 말이네. 언젠가 송목사가 그 분과 대화를 한 번 해 보았으면 좋겠네.


또 최 모 목사는 적어도 작가적인 내 입장에서 두루 자료를 볼 때, 결코 바람직해보이는 인물은 아닌 것 같네. 실제로 그 사람의 주장 자체가 다분히 이단이라고 생각되네. 이단으로 정죄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같은 평신도의 눈에도 그 최목사의 그간 주장들은 매우 이단처럼 보이네. 그런데 송목사가 최목사에게 우호적이라면 친구로서 나는 굉장히 충격이네. 만일 최목사의 이단성에 대해 나에게 근거를 대라고 하면 따로 자료를 보내 드리겠네.


그러나 이런 저런 대화보다, 앞에서 인용한 한 줄의 대화가 아직도 내 가슴을 밧줄처럼 묶어서 저 바다 밑으로 나를 끌고 가는 것 같네. 그래서 내내 생각하다가 이 밤에 한 번 질문을 던져보네.

송목사의 그 말이 진정이었는지 그게 참 궁금하네. ‘풀 거면 묶질 말든지, 한 번 묶었으면 풀질 말든지.’ 이 말이 정말로 자네의 진정어린 생각이었을까? 그게 정말 내 요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네. 만일 자네처럼 지식인 목사가 그런 말을 한 게 진정이었으면 한국의 신앙교육은 아주 큰일이라고 생각을 했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이러하네.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 않은가? 그래서 자네의 말을 죄인인 나에게 치환해보기로 했네. 이런 말이 가능할 것 같았네. ‘죄인을 용서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죄인이라고 하지 말고, 기왕에 죄인이 되었으면 영원히 죄인이지.’ 이렇게 대입이 되었네. 만일 송목사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 그게 참 궁금했네.


어리석은 글쟁이가 모르는 게 많아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해도 좋네. 그러나 나는 요즘 한국교회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목회자들 아래서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싶진 않네. 그런 목회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싶네. 사실이 무엇인지 진실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조차 귀를 열지 않은 교회라면 그 교회가 교회겠는가? 빌라도를 생각해 봤네. 예수님에게 죄는 없지만 관습과 정치가 두려우니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매달아야 했던 빌라도, 그게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네. 참혹한 십자가에서조차 자신의 죄를 고백한 죄수를 용서한 분이 예수님이네. 그런데 자신의 죄와 과오에 대해 용서를 빈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 아닐까 싶네. 예수님은, 회개하면 우리 모두를 용서했기 때문이네.

송목사가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정말로 ‘한 번 묶었으면 풀지 말고 풀 것이면 묶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답변을 한 번 해 주면 내 신앙의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