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에서는 이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죽으면 존재가 없듯이 죄에서 죽으면 그 땅에는 나의 존재가 없어야 한다. 아직도 존재가 있다면 나는 덜 죽은 것이다. 아니 안 죽은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안 죽은 게 아니라 안 죽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쾌락을 놓고 싶지 않아서 기어코 죄 속에 살아남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된 것이다. 세례를 받는 순간 예수님이 나를 위해 흘린 피로 씻기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내 삶이 모두 바뀌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처럼 나도 죽은 것이다. 세례는 결국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상처난 피부에 연고제를 바르면 상처가 쓰리다. 그러나 그 연고제는 상처를 효과적으로 치료한다. 하지만 상처 없는 피부에 연고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위장이 아프면 위장약은 잘 듣는다. 하지만 위장이 아프지 않으면 위장약도 필요가 없다. 위장약이 잘 듣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위장병에 걸려야 할까?
어제 부부싸움을 했다면 오늘 찬양 시간에는 더 많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어제 괴로운 일이 있었으면 오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매일 부부싸움을 하고 매일 괴로운 일을 만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느끼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고구마에는 깊은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가 있다. 모든 씨앗을 땅에 심으면 그 씨앗이 죽어야 새 생명이 돋는다. 다른 씨앗들은 말려서 완전히 딱딱해진 것을 땅에 심으나 고구마와 같은 작물들은 말리지 않은 채 땅에 심는다. 고구마를 심으면 그 고구마가 땅 속에서 새 싹을 틔우고 그곳에서 신비롭게도 줄기와 잎사귀가 나기 시작한다. 이 줄기와 잎사귀가 완전히 자랄 때가 되면 고구마는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한데 아직 새순이 돋고 있을 때는 고구마의 외모는 그대로 있다. 그리고 내용물도 썩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고구마를 먹어보면 고구마는 이미 원래의 맛을 잃은지 오래다. 새순이 돋은 고구마는 이미 과거의 고구마가 아니다. 새 생명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고구마다.
하지만 병든 고구마는 매우 쓴맛이 난다. 생명을 틔우기 전에 상한 고구마에는 아예 생명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쓴맛이 난 고구마는 아예 싹을 틔우지 못한다. 상하지 않은 고구마만이 생명을 틔울 고구마다.
하나님은 내가 건강하게 살기 원하신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느끼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은혜다. 이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고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 모든 죄를 사하셨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내 영혼에 상처를 내고 그 자리에 은혜를 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더 이상 죄의 자리에 가지 않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건강한 고구마가 되어 더 많은 생명을 틔워내는 자로 살기로 한다.)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결국 부활하라는 뜻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에서 죽었으므로 죄에서 벗어난 것이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보다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았다는 뜻이다.)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나는 어머니의 태에서 나온 사람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몸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일 수 있을까?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예수와 함께 죽은 자요 부활하였으니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라. 나는 동일한 나인데 내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내 고향에는 작은 개천이 몇 개 있다. 그리고 그 개천이 끝나는 지점이 바다다. 하지만 개천과 바다의 분명한 경계선은 없다. 어느 순간 개천이 바다가 되고 만다. 어린 나는 그 개천의 물이 어디까지 냇물이고 어디까지 바닷물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바닷물과 냇물이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냇물은 바다를 만나는 순간 곧장 바닷물이 되고 만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틀림없이 물은 똑같은 물이다. 하지만 물이 바다와 만나는 그 어느 지점에서 냇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성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다를 만나면 어떤 물도 바다가 되고 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냇물과 바닷물의 중간이 되는 맛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중간지대란 없다.
냇물이 바닷물이 되는 것은 아주 쉽다. 바다로 흘러가기만 하면 된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서 냇물이 바닷물이 될 순 없다. 냇물로 남아있는 한 영원히 냇물일 뿐이다.
예수님이라는 바닷물을 만나면 냇물이었던 나는 곧 바닷물이 되어 버린다. 만일 내가 아직도 냇물이라면 나는 아직 바닷물을 만나지 않은 것이다. 바다에 나간 물은 반드시 냇물의 삶은 끝나고 바닷물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는 살아있는 자가 되려면 나는 부활해야 한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성경 열심히 읽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냇물이 바닷물로 바뀌는 것이 부활이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부활이다.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살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를 못 박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 사는 오늘이 되기로 한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죄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상태는 없다. 그렇게 볼 때 내 안에는 늘 죄의 군사와 의의 군사가 전쟁을 한다. 그 둘이 무기로 삼는 것이 바로 나의 육신이다.
나는 칼이다. 죄의 군사가 나를 쥐면 의를 찔러 죽이고 의의 군사가 나를 쥐면 죄를 찔러 죽인다. 이 칼은 중간에 떠 있을 수 없는 칼이다. 반드시 둘 중 하나의 손에 쥐어지는 칼이다. 매일, 매순간 죄와 의가 나를 서로 차지하려고 한다. 차지하지 못하면 그들의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칼을 지휘하는 것은 실제로는 양쪽의 군사가 아니다. 칼 자신이 의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칼이 어느 쪽으로 갈 것이며 누구를 희생시킬지 스스로 선택한다. 나는 의지를 갖고 매일매일 죄와 의를 선택하는 칼이다. 그래서 그 선택을 율법에게 맞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자연스레 의의 무기가 된다.)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의의 종이 되는 전제 조건은 말씀에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몸만 따라도 안 되고 마음으로 따르면 의의 종이 된다.)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죄의 종일 때는 굳이 의를 생각할 게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이다.)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믿는 자는 많은 경우 은사를 바란다. 하나님이 주신 수많은 은사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 감사한 영생을 나같은 죄인이 은혜로 받았다. 나는 영생을 얻은 자로서 징표가 무엇일까?
나는 주님의 영생을 입은 한 그루 나무다. 모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에는 씨가 있고 그 씨가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킨다. 열매 없는 나무는 자기 혼자 살다 죽고 만다. 나무의 영생은 열매를 맺어 씨를 전하는데 있다. 그래야 자기 몸은 죽어도 또 다른 나무로 영원히 사는 것이다.
나도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는 올바른 열매를 맺어야 한다. 병든 열매를 맺지 말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죄의 자녀일 때 병든 열매, 그래서 땅에 떨어져도 죽어버릴 사망의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에 열매, 주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을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열매 맺는 삶을 부끄러워한다. 하나님의 눈을 보지 않고 인간의 눈을 보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의의 열매를 맺자. 말로만 의인이 되면 죄의 열매요 실천하는 의인이 되어야 의의 열매가 된다. 내 혀와 내 몸과 내 마음과 내 눈과 내 귀, 모두를 열매 맺는 의의 종으로 살게 하자.
그들을 불법에 내어주는 것도 내 의지와 내어주지 않는 것도 내 의지다. 물론 그 의지의 뿌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은혜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