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행/묵상하는 하루

집으로 숨기(요한복음 20장 10절)

강 영 길 2015. 3. 18. 00:21

요한복음 20장 10절은 "이에 두 제자들이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무덤을 본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자리에 마리아와 여인들은 남아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런데 제자들은 가 버린 것이다.

 

나는 하루를 시작하는 묵상을 오랫동안 해 오던 어느날부터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점을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오늘 아침 내가 묵상한 것을 어떻게 적용하며 하루를 살았는지, 사실 그게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오늘 아침에 묵상을 하고 적용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뤄진다는 내용을 적용해서 하나님의 방법에 맞으면 내가 갈 길을 묵묵히 가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집으로 간" 제자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왜 집으로 갔을까? 그것은 문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가장 쉬운 길은 집으로 가는 것이다.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집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누군가와 갈등이 생기면 숨어버리고 감당하기 어려우면 숨어버리고 짐을 져야할 것 같으면 숨어버리면 된다. 그게 가장 쉽다.

그러나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주님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길이므로 기독교적이지도 않다.

 

마리아와 여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는 집으로 가서

초자연적으로 벽면을 통과하여 방으로 들어가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위로한다.

두려움에 떨면 집에 숨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사는 방법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무덤 주변에서, 사건 현장에서 예수님과 만날 방법을 모색하고

앞으로 해결할 일을 모색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의지적인 선택의 소유자다.

 

나는 오늘 몇 가지 사건을 겪었다. 내가 간증 시간에 양복을 안 입었다는 이유로 어떤 목사님께 긴 말을 들었다.

또 신문에 난 기사 때문에 기사에 실명이 거론된 당사자에게 혼쭐이 났다.

그런가 하면 취재 상대인 목사님에게서 내가 처음 당해본 푸대접을 받았다.(그 목사님은, 전화 받자 마자 "빨리 말하세요." "지금 통화해야 해요?" "나중에 통화합시다." 그렇게 끊었다. 사실은 그 목사님이 나에게 도움을 청해야할 입장인데도.)

 

그러나 나는 오늘 집으로 숨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용기있게 모든 사건에 대처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다운 방법으로 해결했다. 내가 참 뿌듯하다. 그러나 내가 뿌듯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늘 아침 묵상, 집으로 돌아간 제자들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오늘 아침 묵상을 멋지게 했는가가 아니다. 기독교는 말씀을 외우고 사색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 말씀을 나의 삶으로 바꾸는 종교다. 따라서  나는 오늘 말씀을 잘 적용하여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나는 내일도 잠들기 전에 내가 오늘 어떻게 말씀을 적용하고 살았는지를 돌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