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13-17절이다.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과거에 짐승들이나 노예에게 소유자를 나타내는 낙인을 찍었다. 이 낙인을 헬라어로 스티그마(STIGMA) 혹은 스티그마타(STIGMATA)라고 한다. 낙인을 17절에서 흔적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흔적이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예수님의 소유물, 노예라는 말이다.
스티그마는 귀족의 표시가 아니라 노예의 표시다. 노예는 자랑스런 지위가 아니다. 아니 자랑하면 안 되는 부끄러운 존재가 노예다. 초대교회 시대에 만일 이 낙인을 자랑한다면, 예수쟁이라는 것을 자랑하면 그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낙인이 찍힌 자가 세상에 자기 한 일을 드러내면 곧 죽어야 한다. 따라서 그 누구도 스티그마를 드러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된자, 그리스도에 소속된 자 그 누구도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나는 요즘 명예에 대해 묵상한다. 내가 20대에 자유에 대해 묵상했고 30대에 정의에 대해 묵상했고 40대에는 죽음에 대해 묵상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때에 따라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때들이 있었다. 그런 내가 요즘은 명예에 대해 묵상한다.
잘 들여다 보면 인간이 가진 거의 모든 문제는 명예욕에서 나오는 것 같다. 돈을 가지려는 것도 지위를 가지려는 것도 학력을 추구하는 것도 심지어 편견도 차별도, 책임 회피도 그 어떤 것도 깊이 들어가보면 자신의 명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면 명예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사도 바울에게 명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그의 위신이 아니었다. 그는 죽도록 맞았고 고생했으며 결국 순교의 길을 택했다. 그가 "나는 매일 죽는다"고 고백했던 것은 결코 관념적인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죽을 각오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노예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권리가 없으니 자랑할 것이 없고 그에게는 개인의 명예는 없다. 역으로 말하면 바울에게 명예가 있었다면 예수님의 명예는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자랑했으면 예수님을 자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 때문이다. 정말로 분노해야 할 때는 예수님의 명예를 위할 때여야만 한다. 그게 스티그마를 가진 자가 해야 할 일이다. 실제로 바울이 분노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분노하고 누군가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던 것은 모두 예수님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죽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내 명예가 더 중요하다. 내명예가 중요하면 나를 자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자랑한 순간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스티그마가 없는 것이다. 참 무서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주인은 나고 예수님은 종이 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죄인임을, 내가 자랑할 것이 없는 자임을 깨닫고 내 가슴에 스티그마 노예의 낙인이 찍히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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