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경 속의 사건들 중 많은 이야기에서 지탄받을 대상들을 발견한다. 그중 애굽의 바로왕이나 가룟유다, 혹은 신약성경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레위인 등이 가장 대표적인 지탄의 대상일 것이다.
요한복음 19장 31절을 보자.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이스라엘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다. 바로 전날 십자가에서 죽인 자들의 시체를 치우려 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내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예배를 드리러 가기 위해 아직 죽지 않은 시체들의 다리를 분질르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가기 위해 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을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채 그들은 예배를 드리러 간다.
이 모습은 마치 선데이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복사해놓은 것 같다. 일주일 내내 예수님을 팔아먹다가, 일주일 내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다가 일요일이면 성경책들고 교회로 가서 간절히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에 감동도 없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떨리는 사랑도 없다. 그런 다음 다시 한 주일을 동일하게 반복한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다리를 분질르는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보다 오히려 더 못한 모습이다.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고들 한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과연 좋아하시며 그런 예배를 받아주실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명령의 전제는 일주일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주일을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거룩한 안식일을 지낼 자격이 없다.
한데 문제는 사실 나에게 있다. 로마 병정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바로나 가룟유다가 아니라 바로 내가 문제다. 바로 내가 안식일을 지킨다면서 끊임없이 바로가 되고 유다가 되고 교만한 율법주의자가 된다. 내가 바로 그 형식주의자다. 일주일을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지 않은 채 단 하루 교회에 나가면 그것이 바로 형식주의자다. 그 모습이 나다.
34절에 가면 한 병정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러자 물과 피가 나왔다고 한다. 내가 또한 그 창을 찌른 병정이다. 내가 죽은 예수님을 확인하기 위해 창을 찌른자다. 이것이 가장 가슴아픈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다행스런 장면도 있다. 예수님의 시체에서 아마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것을 찌른 병사는 그 물과 피를 맞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손이나 옷에 젖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그의 몸 어딘가에 적셔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 병정이 나중에 성자가 된다. <창>이라는 소설은 그 성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나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씻김을 받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흘린 보혈의 피가, 내가 찔러서 흘러나온 그 보혈의 피가 나에게 쏟아져서 내 삶의 완전히 변화되길 기도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주여 그 피로 나를 씻으사 날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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