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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퀴어 축제에 대한 신앙적 입장 정리

강 영 길 2015. 6. 28. 21:57

동성애 퀴어 축제에 대한 신앙적 입장 정리

나는 2014년 4월 세월호가 넘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수장되었을 때 광화문에 가서 하루 단식에 동참했다. 누군가의 슬픔을 보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믿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6월 2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동성애자들의 퀴어 축제에 반대하는 기독교 단체의 집회에는 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내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더 숙고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주, 6월 21일에 우리 교회에 와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핏대를 세우며 한 목사님이 열변을 토했다. 그 목사님이 결코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런 열변을 토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격분한 태도였다. 그때 그 목사님의 입장에 적극 동조하던 교인들 중 상당수도 오늘 광화문에 가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그 동조하는 분들과 약간의 입장 차이가 있었기에 광화문에 가지 않았다고 하지만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그분들은 왜 광화문에 반대집회를 가지 않았을까? 굉장히 흥분했던 그 목사님의 태도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그 분들은 왜 집회에 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동성애가 시급한 악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반대 집회에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반드시 이뤄야할 가치라고 주장하면서 그런 반대 집회에는 가지 않는다면 그런 신앙적 신념은 아무런 쓸모없는 감정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도덕적 우월주의에 입각한 사디즘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가학적 쾌락주의라는 말이다. 자신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부하면서 남들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정신적인 문제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내 고민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그들의 인권에 대한 생각이다. 그들도 모두 인권이 있으니 각자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고민이다.

 

둘째는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안 되는가이다.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십계명에는 없는 동성애를 한다고 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자이거나 저주받은 자처럼 대하는 것은 어떠한가?

 

셋째, 사람들은 동성애를 왜 이렇게 비난하는가. 십계명이 더 중요하다면 동성애보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가 더 클 것이다. 그런데 동생애는 왜 이렇게 증오하는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보편적 죄여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데 반해 동성애는 극히 소수가 저지르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을 잡기가 쉽다. 특히 비난하는 자들은 자신들은 그 범죄에 빠지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기 때문에 그 범죄를 비난해도 후일 자신이 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아주 낮거나 전혀 없다. 따라서 자신들은 동성애자를 비난함으로써 도덕적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는 범죄에 대해 적극적인 비난을 함으로써 자신이 쉽게 저지르는 죄를 감추려는 습성이 있다.

 

넷째는 내가 정죄감을 갖고 그들을 대하면 안 된다는 신앙적 조심성 혹은 신앙적 자책이다. 나는 탕자였다. 탕자였던 내가 주님 품에 왔기에 이제 형님이 되어야 하는가? 탕자가 형님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는 죄인이었다가 언제든 심판자로 돌아설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내가 심판자가 되는 순간, 나는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므로 그 순간이 내가 다시 넘어지는 순간이다.

 

다섯째, 사람들은 그 많은 도둑질에는 반대집회 따위를 하지는 않으면서 동성애에는 왜 반대집회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고민을 하다가 몇 가지 가닥을 잡았다. 우선 사람들이 도둑질에는 반대집회를 하지 않는 이유가 도둑질을 합법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성애는 합법화 하려는 운동이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동안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국가보안법은 2015년 미국 국무부가 남북의 인권을 비교할 때조차 남한의 부정적인 인권 실태로 국가보안법을 지적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악법으로 지목받는 법이다. 이 법은 그동안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을 죽음으로까지 내몰기도 한 나쁜 법이다. 도둑질을 합법화하지 않았기에 반대집회를 안 했다는 것은 옳지만 국가보안법처럼 더 구조적인 악법에 대해서도 기독교는 침묵했다는 데 대해 기독교는 회개해야 한다.

 

내가 동성애법에 반대시위를 나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교회 혹은 교인들의 이런 이중적이고 악에 눈을 감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저질러온 잘못들에 대해 회개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내 뇌리에 들어있음을 고백한다. 그때 교회는 악에 대해 침묵했지만 그 침묵은 나같은 기독교 청년들에게는 반대로 폭력이었다. 침묵으로 정죄하는 눈총이 더 매서웠다.

 

그러나 나의 이런 태도는 고쳐져야 한다. 나는 동성애 집회에 나가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았다. 나는 그 엄혹한 독재 시대에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돌을 들지 않았다. 나는 비폭력과 평화가 본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동성애자들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향해서도 정죄감 없는 비폭력 저항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느 쪽이든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다. 동성애자들도 언제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교회도 더욱 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일하기를 바라야 한다.

 

율법주의란 정죄감에 휘몰려 비판과 비난과 격분을 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신앙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모든 신앙인이 율법주의를 부정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뿌리 깊은 율법주의에 젖어있다. 나도 또한 언제나 그런 유혹에 빠져있다.

 

신념을 내뱉었으면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비판을 하면서도 그 대상에 대해 사랑을 베풀 시간이 없으면 그것은 한낱 허무주의요 종교 중독에 지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그 어떤 폭력도 거부하면서 신앙적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이다.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은 게 아니라 비폭력으로 저항한 분이라는 준엄한 진리를 따라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길을 따르는 자 곧 그리스도인이 살 길이다.